[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김봉현/ 제주평화연구원 원장

최근 한·일 간에 초계기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조금 진정 국면으로 들어갔다고 하지만 한·일 간에 다시 긴장이 조성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양 국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 문제, 식민지 시대 강제징용 문제, 독도문제 등 합의를 보기 어려운 현안들에 둘러싸여 있다. 일본인들의 혐한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1988년 봄 필자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서울 올림픽을 몇 달 앞둔 시점이었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당시 경제가 절정에 달한 일본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보다는 설레임이 더 컸다.

하버드 대학의 에즈라 보겔 교수는 일본의 놀라운 경제성장에 대하여 ‘Japa; as No. 1'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일본의 소니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일본 정치가들은 ‘일본열도 불침항모론’을 내세우면서 궁극적으로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고 호언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완벽하게 질서를 지켰다. 거리는 깨끗했고, 사람들은 활기에 넘쳤다. 일본인들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 후유증을 완전히 극복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을 건설한 일본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넘쳤고 여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웃나라 한국은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동정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한국 경제는 많은 분야에서 일본에 예속되었고, 정치도 후진적으로 보여 졌다. 일본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는 필자는 항상 일본인들로부터 동정의 눈빛과 멸시의 눈빛을 동시에 받았다. 그들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멸시의 눈빛은 느껴졌다. 그들은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최근 일본에서는 ‘혐한론’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한국을 때려야 책이 팔린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숨 쉬듯이 거짓말을 한다”라고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식자들은 “일본인들에게는 이타적인 정신이 있지만 한국인들은 자기중심적”이라고 문자를 섞어서 주장한다.

내가 30년 전에 겪었던 일본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웃으면서 속으로 숨겼다. 혐한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을 위한 배려와 ‘이타적인 행동양식’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을 그대로 잘 지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일본 사회 전체는 지금 심한 좌절을 겪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가 급격히 후퇴하고 중국에게 뒤지면서 지금은 세계 3위로 주저앉았다. 중국과의 격차는 점차 커지는 반면에 한국과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인도보다도 뒤질 것이라는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들의 눈에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국가가 되었고, K-pop이 세계적인 문화현상이 되고 있다. 삼성이 소니를 누른지도 오래되었다. 한국은 일본을 점차 경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아무리 한국을 헐뜯어도 한국인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1980년대 일본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일본인들이 유일하게 한국 보다 낫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 행동 양식이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일본이 주장하는 이타적 행동이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배려를 말한다. 이러한 배려의 극치를 미국의 문화비교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여사는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어느 비 오는 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손전등을 들고 마주오던 한 일본인이 걸음을 멈추고 손전등으로 발아래를 비추어 주어서 물에 빠지지 않고 골목길을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자랑하는 이타적 행동 양식은 허무 개그에 불과하다. 유명한 정치 철학자 중 한명인 ‘홉스’는 인간에게 이타심은 없다고 한다.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니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진정한 이타심은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여성 철학자 ‘Ayn Rand'는 이기적 행위는 미덕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이 얼른 보기에 무리한 주장인 듯하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더욱 발전시킨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이들과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이타주의는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이타주의와 그 발현인 남을 위한 배려도 결국 이기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적 이타주의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타주의가 결국 나를 위하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에 나타나는 이기적 이타주의는 보편적인 이기주의이다. 다시 말하면 나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공동체 전체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이타주의가 일본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양보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상대방이 양보를 하게 되고, 너와 내가 모두 기분 좋은 윈윈이 되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건강해지고 생산성이 더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이타주의가 한국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행동양식은 좋은 것이고 한국인들의 행동양식은 나쁜 것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 자기들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일본인들의 이타주의가 일본 공동체 이익을 극대화해 준다면, 우리도 일본과 같은 행동양식을 도입할 필요는 있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기적인 이타주의로 무장하여 한국 사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일본의 혐한론을 극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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