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권무일/ 소설가, 역사소설 <의녀 김만덕>, <남이>, <말,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수상록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 평설 <이방익 표류기>

제주국제협의회 회원 19명이 해외나들이에 나섰다. 베트남 호치민으로 연수차 떠나는 길이었다. 제주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울산에서도 인천공항에 속속 모여들었고 베트남에 사업을 벌인 두 회원과 세계를 누비며 무역을 하는 사람도 호치민에서 합류했다. 2019년 1월 17일 밤 9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다음날 새벽 1시(현지시간)에 호치민 공항에 도착했다. 김세억 사장이 현지 직원들과 더불어 꽃다발을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이스틴그랜드호텔로 향했다.

1월18일 조식을 마친 우리는 호치민시 거리투어에 나섰다.

호치민시! 베트남의 남쪽에 위치한 호치민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알려진 사이공이라는 이름이 1975년 통일 이후 민족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 이름이지만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은 사이공이라는 이름에 익숙해 있다. 하노이가 정치의 중심지라면 호찌민은 경제의 중심지이다. 서구동점의 대항해시대 서구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이 인도차이나로 몰려들었고, 19세기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사이공은 무역과 물산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현재 호치민은 외국인 투자가 활발하여 베트남 경제성장의 메카로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호치민시의 넓이는 서울의 3배쯤 되며 인구는 1천만을 능가한다. 호치민에는 식민지 시대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들이 남아 있어 방문자들에게 많은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호치민의 거리는 오토바이 물결이 북새통을 이루고 경적소리가 귀를 찢는다. 호치민 인구의 4/5인 800만 대의 오토바이가 있다고 한다. 승용차가 도로의 안쪽으로 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승용차를 타는 사람들은 부유층에 속한다고 한다. 가로변은 온통 오토바이의 행렬이고 학생들로부터 노인까지, 미니스커트 또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로부터 정장한 여인들 그리고 할머니들도 질주한다. 간난아이 또는 가족을 몽땅 태운 사람들도 곡예 하듯 지나간다. 간난아이의 얼굴에 모기장 같은 면사포가 씌워져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 위에서 낳아 오토바이를 타고 자란다고 한다. 그 복잡한 행렬을 비집고 다니는 오토바이에 오른쪽 백미러가 달려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호치민의 교통시장을 살펴보면 도로가 좁고 도로망이 얼기설기 엉켜있으며 시내버스 사정이 열악하고 생활수준에 비하여 택시비가 비싼 편이라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간편한 교통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음식점 앞에는 오토바이가 줄을 대어 정차해 있고 경찰복 비슷한 옷을 입은 관리원이 지키고 있다. 공공시설에 널찍한 오토바이 주차장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찾은 동코이 거리에는 노틀담성당이 위용을 자랑한다.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이 성당은 프랑스가 1833년부터 6년에 걸쳐 완공한 것으로 벽돌과 자재는 프랑스에서 선적해 온 것이라 한다. 쌍벽을 이루는 40m의 두 십자가탑 중앙에 높이 자리한 마리아상은 베트남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듯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해서 유명하다.

건너편에 베트남의 건축문화재로 꼽히는 거대한 우체국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가 5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이 유명한 것은 고딕/르네상스 양식인데다 저 유명한 에펠이 직접 와서 아치형 천장을 만들었다고 해서다. 지금도 중앙우체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안쪽 벽 중앙에 호치민 상이 걸려 있다.

호치민(1890-1969)은 수천 년 동안 외세에 의하여 찢기고 짓밟힌 조국을 일으키기 위하여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을 전전하며 한때는 밑바닥 인생을 살기도 하고 독립을 위하여 호소하고 싸우며 지냈던 인물로 1975년 베트남이 통일을 이루기 6년 전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해진 옷을 기워 입고 폐타이어로 신을 만들어 신으며 삼찬(三饌)으로 소식하며 살았으며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아꼈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기에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호 아저씨(伯胡)라 즐겨 부른다. 그는 늘 베트남의 독립, 자유, 행복을 외쳐왔다.

우리는 역사박물관을 찾는다. 늘 그렇듯이 박물관은 볼거리는 많지만 쓸 거리는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베트남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우리 고조선만큼이나 오랜 4,000년 역사를 간직한 베트남은 BC200년경 진시황에 의하여 중국에 편입된 적이 있고 다시 BC111년 한나라에 병합된다. 후한 광무제 때 쯩이라는 자매는 코끼리 군단을 이끌고 80명의 여장수들과 더불어 중국을 무찌르고 나라를 세워 여왕으로 군림하지만 이도 잠깐 다시 후한에 점령당한다. 베트남은 한나라,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 초기까지 중국에 병합되어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 1천년 이상을 굴종의 역사를 살아야 했다. 베트남이 온전히 나라를 세울 때는 980년이었다. 그 후 여러 왕조가 바뀌었고 몽고의 침략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이겨냈다.

11세기 초 베트남을 지배하던 리 왕조는 외척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왕족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데 그때 왕세자는 몸을 피해 배를 탔고 그는 바다를 표류하다 고려 땅에 표착했다. 1223년 고려 고종 때의 일이다. 고려는 그를 받아들였고 이(李)씨 성을 사성賜姓했는데 그가 바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이다.

왕조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천년왕국을 이어온 베트남은 16세기 이래 서구동점에 편승하여 문호를 개방했지만 1859년 급기야 프랑스에 주권을 내주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1954년까지 베트남을 지배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베트남을 넘봤지만 일본 패망 이후 무위로 돌아갔다.
1955년 베트남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양분되면서 고딘디엠이 사이공을 수도로 남베트남을 세웠고 1965년 미국이 개입하여 베트남전쟁이 발발했지만 1975년 미국은 베트남을 베트남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19일 조반을 마친 우리는 호치민시에서 북서쪽으로 두 시간쯤 달려 구찌터널로 찾는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쟁을 벌이던 지하터널이다. 당시 밀림지대의 지하에 3층 규모로 흡사 개미굴처럼 판 인공동굴로 입구는 흙과 나무로 교묘하게 위장하고 주변에는 부비트랩을 설치해 미군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고 가로50cm, 세로 80cm의 좁은 동굴을 호미로 파나갔는데 마르고 왜소한 베트남사람들 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견고한 지하터널에는 베트콩사령부, 회의실, 무기저장고, 식당, 침실, 주방, 병원, 대장간 심지어 출산을 위한 방까지 갖추어 있었다고 한다. 불개미집을 통풍구로 활용했고 사이공강까지 연결되어 있어 급수와 배수가 가능했고 수공(水攻)에도 대비했다. 베트콩들은 낮에는 버젓이 일상생활에 임하고 밤에는 이 터널에 출몰하면서 미군을 공격했는데 그래서 많은 미군이 여기서 살상을 입었다.

우리는 먼저 전시관에 들러 비디오를 보고 전시품이 진열된 오솔길을 걸었다. 또한 애초의 좁은 통로를 약간 확장하여 만든 10m의 꾸불꾸불한 통로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호치민시로 돌아온 우리는 미 정보부 청사 자리에 건립한 전쟁박물관을 방문했다. 정원에는 미군이 쓰던 탱크, 전투기, 미사일 등이 진열되어 있고 내부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잔악한 행위를 보여주는, 무고한 희생자들의 사진,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 당시의 감옥과 포로수용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고엽제 살포 장면, 고엽제로 황폐화된 산야, 기형자들의 사진을 볼 때는 울컥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미토로 가는 길엔 사방이 온통 평원광야다. 논에는 벼들이 싯푸르고 더러는 황금색이고 막 수확을 끝낸 논도 있다. 일 년에 삼모작 또는 그 이상을 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끝없는 벌판을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나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김경언 선생의 쾌활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일행의 귀에 닿는다. 여기 호치민에서 27년을 보내며 사업을 해왔고 베트남 원주민들과 살을 맞대며 살아온 산 증인이다. 그의 특강은 한 시간이나 계속된다. 이어서 우리의 가이드 이수익 선생의 보충설명이 이어진다. 이수익 선생은 자신의 별명이 아랑드롱을 따서 이드롱이라며 우리를 웃겼다. 그는 우리의 일정 내내 따라붙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경언의 특강은 계속된다.

베트남은 넓이 33k㎡(한국의 1.5배), 남북 길이 1,650km로 긴 땅 모양은 용을 닮았으며 서쪽 국경지대로는 쯔엉선 산맥이 내리닫고 동쪽으로는 태평양을 끼고 있으며 임야가 70%에 이른다. 티벳고원에서 발원한 메콩강은 4,020km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강으로 하류에 이르러 9갈래로 분류되는데 이를 구룡강이라 부르기도 하며 미토는 강어귀 삼각주를 이른다. 강 주변의 많은 샛강이 구룡강으로 물을 흘려보낸다. 미토의 코코넛은 베트남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며 벌꿀이 많이 채집되는데 사시사철 꽃이 피기에 벌통은 붙박이다.

논밭 가운데 묘단이 여기저기 보인다. 베트남에서는 상을 당하면 이웃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왁자지껄 떠들며 상여를 따라가고 풍악소리가 요란하다. 시신은 집 근처에 가묘를 만들어 보관하여 흙을 덮어두었다가 3년 후 뼈를 추려 석곽에 넣는다. 사각의 묘단에는 비석 또는 묘상각을 세우기도 한다.

베트남인은 대체로 키가 작고 왜소하며 머리와 눈은 검은 색이고 코가 낮다. 베트남에는 54개 종족이 함께 사는데 그 중 80%가 비에트족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지정학적, 역사적, 인종적(몽고반점)으로나 문화적(유교문화권)으로 한국 사람과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경언 선생이 다년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개인 그리고 가족 위주의 생활을 해왔기에 그 정서에 맞지 않으면 배신을 떡먹듯이 한다고 오해하지만 알고 보면 단체생활에 익숙지 않은 그들의 생활습관 때문이다. 농민의 의식구조를 가진 그들은 시간관념이 부족하며 꾸짖으면 씩 웃지만 그것이 비웃음은 아니다. 원래 그들은 아무 때나 잘 웃는다. 그런 사람들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오랜 세월 외세와 싸워왔다. 외유내강형의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베트남 사람들은 인내심과 지구력을 가지고, 또한 공동의 목표와 대의를 위해서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독립을 쟁취한 민족이다.

베트남의 문화를 안엠(Anh Em)문화 또는 멧돼지 문화라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안엠은 부인의 친정식구를 통틀어 말하는데 결혼한 여인이 시가보다 친정을 우선시한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멧돼지는 오로지 가족들만 떼지어 다니기에 가족과 마을 중심의 문화를 멧돼지 문화로 빗댄 것이다.

베드남의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가족에 대한 애착심이 깊다. 그들은 남편이 못 벌어 와도 탓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 안 피우고 도박 안 하면 된다. 우스갯소리가 있다. 남자는 하릴없이 커피숍에 앉아서 사업구상을 한다. 어떤 이는 30일, 어떤 이는 3개월, 나아가서 3년, 길면 30년‧‧‧, 그렇게 세월을 보낸다.
 
미토에 도착한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메콩강을 휘저어 간다. 한강보다 넓은 것 같다. 강물은 뿌연 색이지만 이는 더러워서가 아니고 상류로부터 온갖 영양분이 섞여서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강 건너 강둑에 마련된 식당에는 코끼리귀라 부르는 월척의 민물생선이 상마다 진설되어 있다. 구룡강에서는 한치, 갑오징어, 쥐치, 멸치가 많이 잡힌다고 하며 이들은 세계각지로 실려 나간다.

U&B Corporation의 김세억 사장은 우리 국제협의회 회원인데, 그는 여기 호치민에 세 개의 공장을 가지고 중국 소흥시에도 자신 소유의 공장이 있다. 그는 우리를 맞아 어제(19일) 만찬을 준비했고 오늘 강둑의 식당에서도 그의 회사 베티남인 법인장이 돈을 냈다. 어제 빈 꿔이 공원에서의 야외뷔페는 기억할 만한 자리였다. 숲속의 광장에는 수백 명이 자리할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여기저기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광장을 채운다. 빙 둘러 설치된 여러 개의 조리부스에서 우리는 입맛에 맞는 음식을 가져다 먹는다. 밤의 휘황한 불빛 아래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었다.

20일 오후 우리는 김세억 사장의 봉제공장 중 한 곳을 방문했다. 400명의 기능공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1970년대 우리나라의 봉제공장을 방불케 했다. 여기서 만든 옷들은 미국과 유럽에 수출한다고 한다. 김 사장의 사업의욕과 투지 그리고 넓은 활동무대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귀환을 위하여 호치민 공항에 향하기에 앞서 우리는 사이공강에서 밤의 선상관광을 즐겼다. 무대에서는 가수들이 나와 베트남 노래와 우리 노래를 번갈아 부르며 박수를 받았다. 무대 옆에는 대형전광판이 있었고 거기에는 마침 베트남과 요르단의 8강 축구경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은 오히려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승부차기에서 베트남이 이기자 우리 일행은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며 ‘박항서‧‧‧!’를 외쳤다. 베트남 종업원들도 우리를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누군가들은 연수를 핑계대고 관광을 다녔다고 하지만 우리의 이번 여행은 연수가 주된 일이고 관광은 곁가지였던 것 같다. 참으로 의미 있는 여행이며 값진 추억거리였으며 함께 한 이들과 두터운 정을 쌓았던 일은 큰 보람이었다. 끝으로 양길현 회장과 수고하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까몬(感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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