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제주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후 전업소설가로 활동 중

며칠 전 지역신문에서 반가운 뉴스를 보았다. 제주대학교의 2018년도 취업상황이 아홉 개 거점국립대학교들 중에서 최고의 호조를 보였다는 것이다. 듣건대, 근래에 육지학생들의 제주대 입학생 수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의학이나 수의학 전공은 일찍부터 입학정원 대부분이 육지학생들이었지만, 요즘에는 여타의 전공들로도 외지학생들이 많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제주대학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의 지극한 고향 사랑인데, 그들이 제주대학 발전기금으로 출연한 막대한 성금 규모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일본 거주 교포들이 모아준 성금이 제주도 현지에서 모은 것의 4분의 1을 넘는다는 것이다. 교포들 인구가 10만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제주 땅에 살아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포 2세나 3세들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제주대학만이 아니라, 제주도내 각 마을의 역사 오랜 초중고 학교치고 재일교포들의 고향 사랑 덕분을 입지 않은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의 갸륵한 향토 사랑을 생각하면서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그들의 눈물겨운 과거사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제주인들이 가난과 피압박의 스산한 삶을 뒤로하고 일본 땅에서 새로운 희망을 일구는 의지가 유달리 강했던 것은, 조선시대 후기 2세기 동안이나 제주인들에게 가해졌던 해괴한 ‘출륙금지령’이 해제됨을 역사적인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제주 해녀들이 섬 밖으로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감옥살이 신세에서 놓여나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주인들에게 장기간 억압되었던 활로개척과 발전의 욕구가 강성 대국 일본 땅으로 진출할 기회를 만났던 것은 정녕 불운 속의 행운 코스였을 것이다. 그 당시 육지부의 어느 지역보다도 훨씬 많은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학업과 취업의 원대한 꿈을 쫓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중엽에는 무려 제주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일본에 거주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역만리 일본 땅에서 나라없는 식민지 백성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혹한 핍박과 학대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우리 선조들이 이를 극복하여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닦았음은 그만큼 당차고 끈질긴 투지를 발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제주인들의 성공적인 일본 진출은 4.3비극의 발발로 연결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낳았다. 제국주의 일본 땅에서 강인한 투쟁열사의 저력을 쌓았던 인사들이 4.3사건 당시 폭력정권에 맞서서 항쟁했던 제주인들에게 지도자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들이 지녔던 결사항쟁의 투철한 정의감과 신념의 이면에는 고난 극복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정의의 이름으로 일으키는 거사는 폭력수단을 써도 좋은 것인지, 이에 대한 대가와 희생은 얼마나 엄청난 것일지 깨닫지 못하도록 그들의 선택이 조급하고 자기과신에 젖어있지는 않았을까. 아직도 그 당시 역사의 상흔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후손들 입장에서나마 냉철한 역사인식과 문제의식이 요청된다 하겠다. 그 당시 제주도 남로당 당책인 강규찬과, 남로당 제주조직책이었던 조몽구와, 4,3사건 투쟁열기의 예비단계인 3.10총파업을 주도했던 이운방 등은 일찍이 제국주의 일본 땅에서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의 전력을 쌓았던 사람들이다. 3.1기념투쟁과 3.10총파업 투쟁에서 선두역할을 했던 김봉현과, 입산유격대 사령관이 되어 4.3항쟁을 가열찬 폭력투쟁으로 비화시킨 김달삼과 이덕구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20대 나이의 열혈청년들이었다.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는 나중에 인민위원회와 남로당제주지부의 모태가 되었는데 건준 간부 12인 중에 5인도 일본에서 유학 또는 항일운동 경력이 있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4.3사건 발발 당시에 무력투쟁 노선을 제지하려고 했던 안세훈 등 원로급 좌익운동가들은 대체로 일본에서의 투쟁 경력이 없었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나타난 결과를 놓고 볼 때, 제주인들의 일본진출 역사는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지만 결국에는 우리 민족 전체의 비극적인 사건을 파생시켰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 비극이 4.3 지도자들의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고, 국내 및 국제정치의 불행한 역학 관계를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케 되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란 순탄한 진로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뼈아픈 진실이다. 역사발전의 진로에는 명암과 애환의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평화의 섬 구호를 내건 제주인들의 선택이 어려워지는 것도 역사발전의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고통의 경험은 인생의 깊이를 더해준다. 제주도의 수려한 자연경관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외양만으로 빛을 낼 것이 아니라, 제주인들이 겪은 뼈아픈 투쟁역사의 애환이 곳곳에 서려있는 기억수첩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불의에 대한 가열찬 투쟁과 피맺힌 희생의 역사가 이 땅에 있었기에 제주섬 안의 모든 풍경들은 각별한 의미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의 씨가 되었던 해군기지도 마찬가지이다. 강정마을에 남아있는 군사기지 저지운동의 흔적들은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소중한 역사교과서가 될 것이다. 이 땅의 실질적인 평화수호를 떠맡는 군사시설이라면 군민(軍民) 간의 협화를 복원하는 데에 일조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해군군악대의 행진곡은 제주도에서 가능한 독특한 문화현상, 역사와 예술의 장엄한 융합을 보여준다는 인식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인들 자신의 자기인식에서도 그렇고 외래인들의 제주인식에서도 그렇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