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나의 오랜 친구 한 사람의 경험담이다. 서울에 살던 이 친구는 그 당시 총각신세였는데 제주도 어떤 시골마을의 처녀 한 사람을 간접적으로 소개받고 만나기 위해 하향했다고 한다. 그 처녀도 한번 만나준다는 약속을 전화상으로 했다고 했다. 제주공항에 내릴 때까지도 나의 친구는 가슴 설레는 초대면을 위해 처녀가 사는 시골마을까지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 처녀가 공항까지 마중 나왔음을 알게 되어 실망을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프로포즈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투정이었다. 이 친구는, 여자는 남자가 구애 행동을 보일 때까지 다소곳이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졌던 모양이고, 그 때문이었는지 이들 두 사람의 관계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고 들었다. 남자의 프로포즈를 받은 여자가 응답을 할 때, ‘노’라는 대답은 ‘메이비’의 뜻이고, ‘메이비’는 ‘예스’의 뜻이고, 남자의 구애 신호에 대해 단박에 ‘예스’로 나오는 여자는 낙제점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구애의 신호는 남자가 먼저 보내는 것이라는 관념이 오랫동안 내려온 풍속인 것 같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보다도 먼저 프로포즈하는 것이 제주신화 러브 스토리의 특징이다. ‘천지왕본풀이’에서 지상세계를 다스릴 아들을 얻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천지왕을 그의 침소로 불쑥 찾아간 여자가 바구왕의 딸 서수암이다. 최고신의 체통을 고려한 천지왕이 여성 주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음 날 밤에 여자의 침방으로 찾아간다는 스토리구성은 남성우위 유교사상의 영향 탓이라고 한다. ‘삼공본풀이’에서 강이영성의 막내딸 가믄장아기는, 부모에게서 쫓겨나 헤매다가 자기에게 침식을 제공해줄 마퉁이네 집에 찾아갔을 때, 그 집의 막내아들하고 동침하기를 자원할 정도로 강단이 있다. ‘세경본풀이’의 당찬 여걸 자청비는 하늘 옥황의 아들 문도령과의 사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남성으로 위장하여 서당 글공부 동료관계를 만들어 낸 후 사랑 표현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아둔한 남자 파트너의 잠 자는 감성을 일깨우는 갖가지 깜찍한 술수를 쓰고 있다. 용담동 다끄네당 본풀이와 송당궤네깃당 본풀이에서는, 강남천자국 공주 백주또가 자기의 결혼상대가 제주도에 있음을 알고 단신으로 선뜻 내도(來島)하여 외로운 총각 소천국과 만나 결혼에 이른다. 여자가 남자와의 애정관계를 주도한다는 것은 여성우위적인 세계관의 표출임에 틀림없다.

여러 가지 점에서 제주신화와는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는 그리스신화의 러브스토리를 살펴보자. 남성우위적인 그리스신화에서 남녀간의 애정관계가 남성들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은 자명하다 하겠다. 최고신 제우스는 자기 마음에 드는 여성에 대해서는 여신이든 인간이든 가리지않고 구애를 하는데, 절대권력의 소유자인 최고신의 구애를 거절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다. 그의 배우자인 헤라여신의 제일 중요한 일은 최고신인 남편의 연애상대를 해코지하는 것이다. 최고의 미남신이며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인 아폴로신의 구애가 번번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이성(理性)의 신이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지만, 원래 연애이야기는 실패담이 재미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도 하다. 대장장이이며 최악의 추남신인 헤파에스투스만이 예외이고, 그리스신화 가운데 거의 모든 남성신들이 사랑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고, 이들은 제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재미있고 의미있는 러브스토리를 엮어낸다.

그리스신화에서 여성들이 먼저 프로포즈하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네들은 제주신화의 당찬 여성주인공들보다도 훨씬 더 용감하고 대담한 구애행동을 보이는 예가 많지만, 이상한 일은 이같이 영웅적인 여성들이 주도하는 러브스토리가 배신과 파멸의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다는 것이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크레타 왕궁 지하미로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 나라 공주 아리아드네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테세우스는 귀국길에 오를 때 동반했던 크레타 공주를 도중에 유기해 버린다. 아르고 탐험대의 영웅 이아손으로 하여금 원하는 황금양털을 탈취하여 영광의 귀국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콜치스왕국의 마술사 공주 메데아의 전폭적인 도움 덕분이었지만, 불세출의 장거 끝에 귀국하여 왕이 된 이아손은 아들까지 낳아준 메데아와의 결혼을 마다하고 다른 여성과의 정략결혼을 감행한다. 메데아의 자폭적인 복수극은 이아손의 아들과 왕비의 참혹한 죽음으로 끝난다. 메가라왕국의 공주 스퀼라는 크레타 왕 미노스가 쳐들어 왔을 때 늠름한 적국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마법 머리타래를 잘라서 적진에게 넘겨버리지만 승전 후에 귀국하는 미노스왕으로부터는 매정하게 유기당한다. 이들 세 여성의 공통점은 원하는 남성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부모와 조국을 저버린다는 것이고, 자기가 믿었던 남성으로부터 배신당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애틋한 사랑일지라도 인륜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신화의 러브스토리인데, 여자에 의해 사랑의 단초가 시작되면 불행으로 끝나게 된다는 스토리 구성은 결국 남자가 먼저 사랑의 신호를 보내야한다는 통념을 함축한다 하겠다. 이와 반면에, 제주신화에서 남성보다도 더 용감하게 프로포즈할 할 줄 아는 여성들은,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되 소속 공동체에 대한 충직성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성공하는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제주신화의 여성우위적 세계관이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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