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다시 읽는다. 저자 사울 알린스키는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았다: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용적 입문서(Pragmatic Primer for Realistic Radicals). 리얼리스트와 급진주의자(radicalist)는 엄밀한 구분 없이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지만(체 게바라의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는 말은 대개 자신의 래디컬적인 성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소비된다) 알린스키는 부제를 통해 리얼리스트와 래디컬이 충돌하는 지점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사진=교보문고)

‘현실적 급진주의’의 대립어를 찾자면 ‘이상적 급진주의자’가 떠오를만하지만 래디컬리즘 즉 급진주의는 이미 이상을 강하게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이상적 급진주의’라는 표현은 중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낭만적 급진주의’가 더 적당하지 않나 싶다. 혹은 ‘감상적 급진주의’ 정도일까. 그러고 보면 ‘현실적 급진주의자’라는 말보다 더 이상적인, 불가능해보이는 급진주의는 없다. 또한 그보다 더 급진주의를 모욕하는 표현도 없다. 급진주의적 기치를 내세우는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 감히 급진주의에 현실을 들먹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기 마련.

해서 미국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대부로 불리는 사울 알린스키는 급진주의 진영 동료들에게 욕도 많이 잡수셨다. ‘알린스키 너마저’, ‘알린스키 너 변했어’, ‘배신자스키’ 따위의 소리들을 좀 들었던 모양이다. 책을 뒤적이다가 다른 누가 아닌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아니면 래디컬인가. 지금 나는 키보드나 두드리는 사람일 뿐이지만 지금 키보드가 놓인 책상을 굳이 좌표 위에 옮겨본다면 ‘급진주의적 현실주의자’ 정도에 위치하려나 모르겠다. 말인 즉 역시나 탁상에서 공상이나 펼치는 한가한 신세라는 얘기다.

다시 돌아가 사울 알린스키의 현실적 급진주의자라는 그 포지션 혹은 길을 생각해본다. ‘현실 속으로, 현실 속으로’ 끝없이 주문하는 알린스키 하르방. 누군가의 현실적인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 해서 그의 꿈이 타인보다 아름다운 건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일 터. 꿈이 아름답다고 해서 일반 대중보다 더 나은 정치 감각이나 소통 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누가 얼마나 옳든, 얼마나 아름답든 한계는 따른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응시가 요구된다. 자기 평가에 냉정하지 못한 래디컬은 자랑할 만한 합리적 비판 능력과 조직력, 소통의 기술을 잃게 되기도 한다. 내적 분노가 비판 능력과 조직력을 압도하고 소통의 기술까지 집어삼키는 우려할 만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끝으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한 문단 옮긴다. “누구든지 조직가의 자질 중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래도 여전히 조직가로서 유능하고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자질 중에서 하나는 예외다. 바로 소통의 기술이 그것이다. 당신이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경우에 당신은 실패자도 못 된다. 당신은 단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필자야말로 하루하루 소통 기술 부족을 절감하며 살고 있다. 사울 알린스키의 경험과 통찰에 입각하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꽤 많은 셈이다. 다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은 바로 ‘거기’에 사울 알린스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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