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4월은 오고

이제 다시 봄이다. 꽃은 피고 봄은 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이 평범한 진리가 새삼스럽다. 얼마 후면 4·3 71주년 추념식이 열린다. 70주년이었던 2018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위령제에 참석해서 제주에 봄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역사는 뒷걸음쳤다. 제주는, 4·3은 잊혀졌다. 보수 정권들은 제주 4·3을 ‘불편한 역사’로 여겼다. 지금은 여당의 대표가 된 당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2017년 위령제에 참석해 제주 관광산업 재도약과 제2공항, 신항만 건설 지원 등의 이야기로 추도사를 이어갔다.

<사진=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를 듣던 유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아흔이 넘은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소설가는 그날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제주의 봄’ 그것은 제주만의 봄이 아니었다. 70년 분단 체제. 남북을 꽁꽁 얼게 만들었던 대립과 반목의 시대가 풀릴 것이라는 기대였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던 때였으니 제주의 봄을 시작으로 이 땅에 흐드러진 봄이 한바탕 올 줄 알았다.

그렇게 봄이 되면, 여전히 말할 수 없었던, 70년 전 수많은 촛불로 타올랐던 사람들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경훈 시인의 시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 없어진 것이 억울한 것”이라는 그 억울함을 풀 수 있을 줄 알았다. 얼마간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법 군사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수형인들. 재심 결정이 받아들여졌고 2019년 1월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70년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는 순간, 이제 팔순을 넘긴 오희춘 할머니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 여전한 금기, ‘빨갱이’

70년. 열다섯 꽃다운 소녀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할머니로 늙어갔던 세월. 너무 늦게 와버린 정의 앞에서도 살아남은 수형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감옥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가해졌던 수많은 오해와 편견들. 그 편견의 손가락총에 수형인들의 가슴은 수백 번, 수천 번 무너져 내렸다. 1948년과 49년. 이른바 제주섬 전역을 ‘초토화’ 시켰던 그 학살의 현장에서 ‘빨갱이’,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총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운 건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찢어 죽이는’ 공공연한 학살의 주역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력의 핵심은 학살의 방법과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제주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했듯 학생을, 순박한 어부를, 고국으로 돌아와 공부하던 재일 교포를 간첩이라고 지목했다. 영장 없이 체포하고, 고문하고, 구금했다. 민청학련,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빨갱이’라고 손가락총으로 잡아 죽이던 학살의 유전자가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민낯이었다.

세상도 바뀌고, 민주화가 되었으니 바뀔 줄 알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세 번의 진보 정권이 탄생하면 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피로 쌓아올린 DNA는 변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약산 김원봉 선생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 가능성을 언급하자 약산 선생을 “반 대한민국 북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거다. 약산 김원봉 선생. 몇 해 전 화제가 되었던 영화 ‘밀정’에서 영화배우 조승우가 연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다.

그런 약산 선생을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얼마 전에는 “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했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반민특위가 아니라 반문특위였다’면서 국민들 국어실력을 탓하기도 했다. 10년 전이다. 2007년 당시 새누리당 나경원 대변인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논란이 되자 BBK를 설립했다고만 했지 ‘내가’ 설립했다고 하지 않았다면서 주어가 없다고 했다. 국민들 국어 실력 탓하는 건 나경원 원내대표의 오랜 습관이다.

<해방은 또 다른 점령이었다. 일본 군대가 물러나자 미군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진은 해방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다.>

약산 김원봉 선생은 식민지 시절 의열단을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지휘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의 마지막 국무위원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애썼던 ‘1급 수배범’이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해방 후 약산 선생이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노덕술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따귀를 맞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일본놈에게도 이런 수모를 받지 않았는데 해방된 나라에서 친일 경찰 출신에게 따귀를 맞아 억울하고 분하다’는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약산 선생이 남북협상 남측 대표로 북한에 갔다가 남은 이유. 따지고 보면 해방 후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던 현실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약산 김원봉 선생 비판의 맥락을 따져보면 ‘공산주의자’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논리라면 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택했던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만다. 식민지 시절 조국독립을 염원하던 수많은 운동가들에게 이념은 하나의 수단이었다. 당대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재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낙인’이다.

<해방 후 제주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 찍혔다. 그 낙인의 손가락질이 제주의 피울음이 되었다. 그림=박경훈 작 '토민'>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 발굴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부터 이뤄진 일이다. 지금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정권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또 다시 ‘공산주의자’라고 발끈한다. 마치 70년 전 제주에서 ‘빨갱이’는 박멸해야 한다고 하면서 손가락총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던 일이 반복되고 있는 듯하다. 제1야당 원내대표의 역사인식에 당내에서 비판보다는 옹호 여론이 높은 걸 보면 완연한 봄날에 두터운 겨울 파커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을 북한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고 공격하는 게 최고의 한 수라고 생각하는 야당이니 그럴 만도 하다.

사회주의자로, 공산주의라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혐오하고. 그들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정치. 그건 끊임없이 국민을 나누고 분열시키는 정치다.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간첩’이라고 ‘빨갱이’라고 몰아세웠던 ‘학살의 정치’, ‘학살의 역사’를 반복하는 일이다. 이런 ‘학살의 DNA’가 무서운 이유는 그 시작이 바로 해방 공간 제주였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불량위패’라고 공격했던 극우단체들. 그 지겨운 손가락질이 2019년에도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3. 동백, 그리고 볼레

‘공산주의자’. 아직도 우리 사회의 금기이다. 4·3진상규명의 역사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반공’만이 유일한 ‘진리’였던 시절. 그것은 언제라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현실적 공포였다. 천형 같은 낙인을 벗기 위해 무섭고 두려웠지만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게 4·3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2001년 4·3 특별법 위헌 소송이 극우 단체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헌법재판소는 그들의 위헌심판청구를 각하했다.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헌재가 희생자를 규정함에 있어 당시 무장대 지도부 등을 희생자로 포용하는 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다고 했다. 이 헌재의 결정은 희생자 심의 의결의 최종 기구인 4·3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용인되고 있다.

헌재 결정 이후 지금까지 철회된 희생자는 10명에 이른다. 아버지의 위패를 내리면서 한 유족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방은 살아 이실 때도 숨엉 댕기곡, 죽어서도 숨엉 댕기곡” 헌재 결정이 내려진 지 이제 18년이 지났다. ‘제주 4·3 사건’이라는 중립적 명칭을 넘어서 정명이 필요하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제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항쟁이냐, 학살이냐.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우리 사회는 이 두 가지 명칭을 두고 오랫동안 토론을 할지 모른다. 3만 명이 세상을 떠났다. 동백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갔으니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다. 매년 사월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다는 이유도 바로 그 수많은 죽음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일 거다.

재일 교포로 제주 4·3 당시 남로당원이었던 김시종 시인. 1929년생이니 이제 만 아흔 살이다. 일본에서 만났을 때 김시종 시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아픈 몸으로 제주도립병원에 숨어 지내고 있었을 때 자신의 동료였던 백 아무개 군이 시인을 보고 ‘볼레 땅 오켜’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볼레 열매. 가을이 되면 제주 오름 지천에 빨갛게 익어가는 볼레 열매를 볼 수 있다. ‘볼레 땅 오켜’는 ‘볼레 따러 가겠다’는 말이다. 그건 볼레가 있는 산으로 가겠다는 말이고 싸우러 가겠다는 신호였다. 1948년 10월 무렵이면 초토화 작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찢어죽이고, 말려 죽이고, 태워 죽이는’, 그 잔혹한 토벌을 뻔히 보면서, 볼레 따러 산으로 간다는 게 죽으로 가는 줄 뻔히 알면서도, 볼레를 따러 산으로 갔다. ‘볼레 따서 오겠다’던 시인의 친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제주 4·3특별법 2조에는 희생자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희생자란 제주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자로서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을 말한다.” 토벌의 주역이었던 군인, 경찰들도 4·3 희생자가 되는데 왜 볼레를 따러 산으로 갔다는 사람들은 희생자가 될 수 없는가. 죽음에도 이념이 있는가. 나경원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발언,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4·3 위령제에서 제외된 죽음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해야 할 것인가. 송이 송이 떨어진 붉은 동백꽃을 기억하는 것만큼 그 보다 더 붉었던 볼레를 이제는 기억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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