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 여행길에 오른 지 24년이 되었다.

‘오름 나그네 김종철’, 183회의 신문 기획연재를 마치던 해인 1994년, 늑골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길어 3~4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 판정이었다.

그러나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원고와의 씨름은 계속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혼신을 다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록을 묶어내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피 말리는 작업이었다.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24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된 김종철 저 ‘오름 나그네’ 3권

그렇게 해서 1995년 1월 ‘오름 나그네’가 세상에 나왔다. 전(全)3권, 도서출판 ‘높은 오름’이 펴냈다.

‘오름’은 제주어다. 독립된 산 또는 봉우리를 일컫는 한라산 자락의 기생화산이다.

제주의 오름 330여개, 한 섬이 갖는 기생화산의 수로는 ‘세계최다’라 했다.

그래서 김종철은 제주를 ‘오름의 왕국’이라 했다. ‘오름 나그네 책머리’에서다.

‘그렇다. 섬 어디를 가나 오름이 없는 곳이 없다. 오름이 없는 섬의 지형, 바람만 스산한 죽음의 황야 같은 섬의 땅을, 섬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오름 자락에 살을 붙이고 살아 왔으며 뼈가 묻혀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촌락형성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신앙의식의 터로서 성소시(聖所視) 되어와 지금도 그 품에 제(祭)터를 간직한 곳이 많다.

숱한 신화도 피워냈다. 올림포스가 그리스 신화의 신의 거처라면 한라산을 비롯한 오름들은 제주 신화의 신들의 고향이다.

때로는 항쟁의 거점이 되었고 외침 때의 통신망 구실도 했다.

그 기승(奇勝)으로 하여 시객(詩客)들의 영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섬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오름마다에 진하게 배어 있다고 했다.

김종철의 책머리에‘ 말은 이어진다.

‘산체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와 마주해 앉았노라면 오름은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 온 저마다의 몸짓으로 다가와 준다’는 것이었다.

‘멀리서는 그저 비슷비슷해 보이던 것들도 어느 하나 그 모양새, 차림새가 저만의 것 아닌 것이 없으며 그 빚어내는 빛깔이며 바람결의 감촉마저 다르게 느껴진다‘고 했다.

‘오름 나그네’는 이 같은 제주 오름의 겉과 속을 섭렵(涉獵)하여 다듬어 놓은 세계 최초의 기록이자 ‘제주 오름 대장경(大藏經)’이다. ‘제주 오름의 바이블’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그만큼 ‘오름 나그네’는 제주의 모든 것을 녹여서 우려냈다. 원초적인 제주의 담금질이었다.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인 지리지(地理志)류와는 격과 향이 다르다.

'오름 나그네'에 실린 제주의 오름 전경(사진:고길홍)

오름의 빼어난 자태는 물론, 이름 모른 들꽃들의 분포 및 생태 환경, 역사, 인문, 지리, 자연, 식생, 인물, 민속신앙, 지형과 지질, 기상 관련까지 망라돼 날줄과 씨줄로 촘촘하게 엮어 졌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지도와 조선총독부, 미군이 제작한 지도를 살폈고 지명관련 문헌, 마을에 관한 보고서, 신화와 전설, 여러 성씨의 족보까지 헤아렸다.

비문에 새겨진 글을 채록하여 분석했다. 식물을 채취하고 한자 이름위에 가려진 우리말 이름도 찾아냈다. 자료는 방대했고 조사와 분석은 치밀하고 치열했다.

이렇게 해서 책이 나오고 20일 후, 살을 애 듯 차가운 2월, 삭풍(朔風)이 윙윙거리며 울음 타던 날, ‘오름 나그네 김종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예비했던(?) 죽음’이었다.

하늘나라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재로 돌아온 유해는 한라산 영실과 웃세오름 어간의 선작지왓에 뿌려졌다. 유언에 따라서다.

선작지왓은 ‘오름 나그네 김종철’이 생전에 미치도록 좋아했던 곳이다.

그는 ‘웃세오름 답사기’에서 선작지왓을 ‘웃세오름 남녘 자락 일대 벌판 진달래 꽃밭을 이루는 곳’이라 설명했다.

‘늦봄,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의 넘실거림에 묻혀 있으면 그만 미쳐버리고 싶어 진다’고 했었다.

선작지왓의 ‘탑궤(탑모양의 바위 굴)’ 주변에 뿌려진 그의 유해는 봄이면 봄마다 진달래 꽃밭의 정령(精靈)이 되어 ‘탑궤‘를 지킬 터이다.

그래서 ‘선작지왓 탑궤’는 ‘오름 나그네 김종철’을 그리워하는 제주의 후배 산사나이들의 ‘큰 바위 얼굴’이기도 하다.

영원한 오름 나그네 김종철(1927-1995)

김종철이 떠난 후 ‘오름 나그네’는 대단한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켰다.

오름은 전국적 관심사로 떠올랐고 제주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름에 미친 ‘오름 마니아’들이 줄을 이었다. 오름 탐방을 위한 도내외의 오름 동우회도 우후죽순(雨後竹筍)식으로 생겨났다.

절판된 지 오래되어 잊혀질만한데도 독자들의 ‘오름 나그네’ 재출간 요청은 끊임이 없었다.

이러저러 보낸 세월 24년 만에 ‘오름 나그네’가 새로운 단장으로 재출간 되었다.

‘오름 나그네 김종철’의 아내 김순이 시인에 의해서다. 출판책임은 서울에 소재한 ‘다비치’다. 양장의 전 3권. 3월 25일에 인쇄 됐다.

김시인은 ‘이토록 아름다우니, 이토록 소중하니_선작지왓에 부치는 그리움_’이라는 제하의 ‘재출간에 부쳐’를 썼다.

‘오름 나그네 김종철’이 ‘얼마나 애틋하게 한라산과 오름을 사랑했고, 얼마나 치열하게 오름과의 만남을 지속했는지’를 절절하게 풀어놨다.

‘재출간에 부쳐’는 ‘오름 나그네 김종철’에 대한 그리움의 물감을 풀어놓은 아름다운 사랑의 수채화‘다. 애틋한 사부곡(思父曲)이기도 하다.

오름 취재의 겉과 속, 처음과 끝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오름 나그네 김종철‘은 ’내면에 누구도 헝클어뜨릴 수 없는 전아(典雅)함을 간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생활에는 서툴렀으나 담백한 사람이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세속을 초탈한 수도승 같은 사람’

세속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았고 물욕과 권력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시장통 허름한 식당에서 마신 싸구려 술에 취해 흐린 발길로 비틀거릴 지라도 세속의 때는 그를 오염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김시인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오름 나그네 김종철’과 술잔이라도 나누었던 이들은 그의 고매한 인품과 사람냄새 나는 부드럽고 꾸밈없는 어울림을 잊지 못할 것이다.

1927년 제주시에서 태어났다. 생전의 ‘오름 나그네 김종철‘은 제주의 대표적인 산사나이였다.

제주산악회를 창립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산악 구조대인 제주적십자 산악안전 대장으로 조난 구조 작업 등 많은 일을 했다.

그의 한라산행은 1951년을 시작으로 해서 암 투병 전 까지 1000회를 훨씬 넘겼다.

김종철에게 한라산행은 산을 밟고 오르는 등산(登山)이 아니었다. 산의 품으로 안겨 들어가는 입산(入山)이었다.

한라산은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함이었고 아늑함이었다. 그 품에 안겨 세속의 고단함과 삭막한 먼지를 털어냈다.

오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가시덤불 손톱과 발톱을 세워 완강하게 거부의 몸짓을 보였다. 다가서기가 녹록치 않았다.

그래도 김종철은 오름이 온몸으로 밀어내고 앙탈을 부릴수록 역시 온몸으로 비집고 안기어 들어갔다.

결국은 오름이 한 자락씩 너울을 걷어내고 속살을 보이기 시작했다. 막무가내의 지독한 사랑에 지쳐 오름이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오름 나그네’는 그런 지독했던 막무가내 사랑의 기록이다.

‘오름 나그네’의 문장은 유려했다. 문체는 부드럽고 담백했다. 도두라진 시(詩)적 감수성은 읽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글쓰기의 택스트 북’이라는 이들도 있다.

‘아득히 한라산 능선은 수도 없이 늘어선 오름들을 거느리고 바다 속으로 길고 긴 자락을 감추어 간다’

성산 쇠머리 오름에서 조망했던 한라산 능선의 파노라마 영상이다.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고 있었고 엉겅퀴는 고단한 보랏빛으로 흩어져 있다. 잔디에도 늦가을 빛이 짙게 깔렸다.

겨울을 앞둔 두메 들판에서는 스치는 바람결에도 성크름한 기운이 서린다.

머지않아 이 너븐드르(넓은 들)엔 하늬라는 매운 지배자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늦가을 왕이메가 자리한 광평리 일대 벌판의 묘사가 눈에 선하다.

‘오름 나그네 김종철’은 외진 들녘 멀찍이 있던 오름들의 손을 잡아 우리 앞에 이끌어 왔다.

‘오름이 이토록 아름다우니, 이토록 소중하니, 진정으로 사랑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영혼이 맑은 자연인으로, 무소유의 아름다운 자유인으로 68년을 살았던 ‘김종철’, 재출간한 ‘오름 나그네’에는 오름을 사랑해 달라는 그의 간곡한 육성이 올올이 배어있다.

24년 만에 재출간한 ‘오름 나그네’는 오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명징(明澄)한 울림으로 다가설 것이다.

‘오름 마니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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