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이 안 세워졌잖아. 활 세우고."

오후 4시 방과가 끝난 시간. 제주시 미리내공원 안의 좁은 숲속에서 학생들이 양궁을 한창 배우고 있었다.

미리내공원의 한 작은 맹지에서 양궁 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사진=김관모 기자)

벌써 수년간 훈련을 해도 활을 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올곧은 태도와 정신으로 한치의 실수도 없이 활을 쏠 때, 화살은 좁디 좁은 9점과 10점의 노란색 과녁에 들어갈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 선발은 '올림픽보다 어렵다'고 할 정도로 경쟁의 연속이다. 세계랭킹 1위의 기보배 선수나 구본찬 선수도 국가대표 선발에서 탈락한 적이 있을 정도다. 총 4,055발을 쏴서 고르게 우수한 성적을 거둬야 국가대표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궁사(弓師)들은 "습사(習射)만이 살 길"이라는 말을 늘상 되내인다. 

하지만 제주도를 연고로 한 학생들은 양궁 연습이 만만하지 않다. 번번한 양궁 훈련장 하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숲속에 마련된 양궁장은 임시로 마련된 공간이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진드기나 모기 때문에 학생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진드기 퇴치제를 온몸에 바르지 않으면 연습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연습하기에 충분한 거리조차 마련돼있지 않다. 고등부의 경우 경기를 위한 사정거리는 50미터다. 하지만 이곳 연습장은 30미터가 채 나오지 않는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100미터에 이르는 간이연습장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곳을 사용할 수 없다. 안전을 문제 삼아 누군가가 제보를 하면서 제주시가 사용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 사용하는 공간도 제주도의회 이상봉 의원이 도움을 주고자 개인 토지를 잠시 빌려준 곳이다. 학생들이 입은 훈련복에 적힌 '제주특별자치도'라는 글자가 민망할 지경이다. 

이상봉 의원의 도움으로 마련한 간이 훈련장의 모습.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수풀에 과녁만 덩그러니 놓여있다.(사진=김관모 기자)
미리내공원의 한 작은 맹지에서 양궁 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 훈련복 등에는 제주특별자치도라는 이름이 적혀있다.(사진=김관모 기자)

◎제주도는 양궁 최강국 중 불모지...활성화의 길 어려워

양궁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대표적인 효자종목이다. 1970년대부터 양궁이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한국은 엘리트 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해왔다. 그 결과 1984년 LA 올림픽을 시작으로 국가대표선수들이 대회마다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한국은 전세계적인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양궁장이 만들어지고, 많은 학교들에서 양궁인을 배출하기 위해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다. 제주도양궁협회 역시 1983년에 창립돼 36년 넘게 인재양성과 도내 양궁 보급에 애쓰고 있다. 

하지만 사실 제주도는 양궁 불모지다. 지난 5월에 열린 제48회 전국소년체전에서 제주특별자치도 양궁부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미리내공원에 마련된 간이 훈련장의 모습. 공사하다가 멈춰진 포크레인의 모습도 보인다.(사진=김관모 기자)

제주도민체전에서도 양궁경기는 시범경기일 뿐 정식경기로 채택돼있지 않다. 

현재 양궁부에 등록된 학생들은 중·고등학생까지 합쳐서 9명 정도. 그 외에 150여명의 클럽팀이나 동호회가 있지만, 도내 양궁경기는 활성화돼있지 않다.

그래도 학생들은 기죽지않고 매일 훈련을 위해 미리내공원을 찾는다. 활 쏘는 폼이 좋은 학생도 있어서 벌써부터 러브콜을 보내는 학교들도 있다고 한다. 한 학생은 "국가대표가 되어서 제주도에 양궁장을 세우는게 꿈"이라고 한단다.

◎제주 연고 프로팀도 있는데...광역단체 중 유일하게 양궁장 없는 제주도

사실 제주도를 연고로 하는 양궁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제주도를 연고로 한 프로양궁팀은 현대제철과 현대백화점 두 곳이 있다. 

특히 현대제철 양궁팀에는 현 금메달리스트 오진혁 선수와 구본찬 선수가 있다. 특히 구본찬 선수는 2016년 리오올림픽 2관왕이기도 하다. 현대백화점도 지난 4월에 열린 전국대회에서 금메달 6개와 은메달 2개를 따내면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 

현대제철 양궁단의 모습. 2016년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구본찬 선수(맨 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 놀랍게도 이들은 제주도를 연고지로 두고 있다.(사진제공=현대제철 양궁단)

하지만 이들 프로팀은 제주에서 연습하지 않는다. 훈련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전국 광역지자체 중 양궁장이 없는 유일한 지역이다. 양궁 인재가 적고, 시설이나 장비도 부족하다보니 양궁을 배우고 싶어도 접근조차 힘들다.

그래서 프로팀들은 다른 지역에 연습장을 마련한 상태다. 현대제철 같은 경우에는 회사가 인천에 설립한 훈련장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현대백화점은 경기도양궁협회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수원시에 훈련장을 마련했다. 

'제주특별자치도'라는 이름을 걸고 있지만, 제주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제주도에서 훈련해 컴파운드 보우 국가대표 후보까지 올랐던 정선옥 씨(29세)도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올해 초 제주도를 떠났다.

이에 홍명환 제주도의원은 지난 도의회 임시회에서 양궁훈련장의 부재를 지적하기도 했다. 홍 의원은 "제주도가 체육시설을 확충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도내에 양궁장 하나 없어서 딱 한 사정"이라며 "행정당국이나 동료의원들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리내공원의 한 작은 맹지에서 양궁 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의 모습. 훈련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생들은 티없이 맑았다.(사진=김관모 기자)

◎전국에 다 있는 양궁장...제주에만 안전 이유로 "안 돼"

행정당국이 양궁장이나 양궁훈련장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로 대는 것이 안전 문제다. 

애초 제주도양궁협회는 학생들의 훈련장을 반드시 제주시 도심 내에 마련해야 하는 형편이다. 지금 훈련받고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노형동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미리내공원에서 훈련을 하다보니 일부러 학교를 그 근처로 정한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제주시는 양궁협회가 훈련하는 미리내공원의 공터나 축구장이 차도 바로 옆에 있어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른 후보지로 언급된 곳이 삼화지구의 저류지와 한천저류지 등이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주민들의 반대나 접근성의 어려움으로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제주도양궁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손혜진 퍼니양궁협동조합 대표는 이런 어려움과 고민을 토로했다.

"학생들이 전국체전에 나서려면 출석율을 반드시 채워야하기 때문에 오후 4시부터 훈련할 수 있어요. 하지만 너무 외곽으로 넘어가게 되면 훈련할 시간이 부족해져요. 게다가 과녁판으로 사용할 매번 30~40kg짜리 다다미 5~6개를 옮겨야 하는데 그럴 인원조차 없죠. 비가 오면 비가림막 훈련장비도 따로 챙겨야 하는데 사실상 사용하기 어렵고요."

학생선수대회 출전을 위해서 경북 예천에서 전지훈련 중인 제주 훈련생들의 모습. 좋은 훈련장이 부족해서 훈련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한다.(사진제공=퍼니스포츠양궁클럽)

이상봉 의원도 "화살을 쏜다는 거부감 때문에 민원이 들어오는데 막상 가보면 인도나 차도와의 이격거리, 코치의 존재 등으로 실제 위험한 상황은 없다"며 "행정당국이 경직된 사고보다는 현장을 직접 확인도 하고 스포츠 활성화 차원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게 중요하다고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양궁은 효자종목이고 학생들의 정신집중이나 인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어른세대들의 배려해주어야 한다면서 설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양궁 훈련은 사실 하루만 쉬어도 기복이 심해진다. 매달 1번 이상은 전국대회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고른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이 필요하다. 프로팀 같은 고급인재들조차 제주도를 거의 찾지 않기 때문에 동기부여도 어렵다.

제주시생활체육공원에서 양궁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양궁훈련은 정신과 태도를 바르게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안전과 인성이
최우선이다.(사진제공=퍼니스포츠양궁클럽)

◎전지훈련 매년 10팀 이상...장비와 인재 아쉬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궁인들이 전지훈련을 위해 제주도를 찾는다. 1년에 약 10팀 이상이 꼬박꼬박 제주도에서 7일 이상 머물면서 훈련을 하고 간다고 한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따뜻한 기후 조건이 매력적이라는 것. 하지만 양궁연습할 장비가 부족하다보니 한라산을 등반하는 산악훈련을 하고 가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다. 

손 대표는 "가끔 훈련을 위해 장비를 마련해달라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겨우겨우 준비를 마칠 때가 많다"며 "장비나 사람이 부족할 때면 아쉬움을 전지훈련하러 온 분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전통활인 국궁(國弓)을 다루는 제주도궁도협회의 경우에는 매달 1~2회의 경기가 치러지고 있다. 최근에는 전국대회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인프라를 갖춘 상태다. 물론 궁도협회 역시 자리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양궁협회도 도내 양궁의 활성화를 위한 고민 중이다.

현재 미리내공원의 간이 훈련장도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또다시 학생들은 훈련할 장소를 찾아서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체육 진흥 활성화가 큰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날, 제주도 양궁의 현실은 엘리트 체육의 인식 부족과 인재 양성 인프라의 부재를 다시금 느끼게 하고 있다.

훈련장에 앉아서 명상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이 학생들은 또다시 훈련장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사진제공=퍼니스포츠양궁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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