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북촌희생자 479 신위.

'한 맺힌 애통일랑 구천에 뿌려두고 속 터져라 웃으소서. 이승 하늘 훨훨 날아 저승 하늘로 활짝 나래 펴소서'

2004년 정월 초 열흘 날(음력 12월 19일) 북촌초등학교 교정.

56년 전 무자년 4.3 당시 음력 동지 섣달 열 아흐렛날 처럼 이날도 매서운 바닷 바람이 불었다.

56년 지난 북촌교정에 어김없이 분 매서운 바닷바람

북촌리(이장 김영수)와  제주도4.3사건희생자 북촌유족회(회장 김석보)가 이날 오전 11시부터 북촌교정에서 마련한 '북촌주민 4.3위령제'.

 '북촌리 학살' 이후 반세기 넘게 숨죽여온 주민들이 애통한 설움의 눈물과 화해의 마음을 담아 마음의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스스로 걸어나온 참 역사의 현장이었다.

▲ 제주4.3사건 북촌주민 집단희생자(479위) 위령제가 10일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가운데 희생자 유족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어제(9일) 음력 12월 19일을 기해 집집마다 별도로 제사를 지낸 이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에 나와 정성스레 제단을 마련했다.

제각각 치르던 제사를 한데 모아 주민 스스로 처음 치른 '공동 제사'인 셈이다.

4.3 당시 목숨을 잃은 479위 원혼들의 이름이 빼곡히 열명된 붉은 색 천을 바라보며 후손들은 뒤늦은 통한의 눈물을 삼키고 고혼(孤魂)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지난해 4월 (사)제주민예총이 당시 북촌교 현장과 함께 가장 희생이 컸던 마을 입구 속칭 '당팥' 학살 현장에서 4.3예술제 가운데 '2003 찾아가는 현장위령제' 사업으로 치른 '북촌리 대학살 해원상생굿'이 타인의 힘에 치렀던 위령제라면 오늘은 주민 모두가 십시일반의 힘을 모아 치러낸 '진정한 제의'였던 셈이다.

더욱이 마을 단위에서 처음으로 공동 봉행되는 이번 위령제는 지난해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4.3진상조사 보고서가 확정된 이후 처음 치러진 위령행사라는데도 의미가 크다.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이재후 조천읍지회장(65)은 "5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동안 억울함을 간직하면서도 할말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며 "오늘은 유족들이 맘껏 울어도 보고, 달래도 보고, 돌아가신 영령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벅차오른 감격을 전했다.

4.3사건으로 아버지와 누나, 큰아버지 일가와 숙부를 모두 잃었던 그는 "오늘 위령제가 다가오는 새 시대에 주민간 화합과 단결을 통해 고장을 더욱 발전시키고, 제주도가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갈 수 있도록 이바지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이날 김우남 도의회 부의장을 비롯 강원철 도의회 4.3특위위원장, 김의남 북제주군의회 의장,현찬범 조천읍장, 4.3 유족회, 민요패 소리왓과 놀이패 한라산 및 지역주민 등 300여명이 4.3원혼들의 넋을 달랬다.

▲ 북촌초등학교 앞에 걸린 현수막.

 '56년전의 기억...음력 12월 19일 일제히 제사'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한 북촌리는 1948년 음력 11월 16일과 28일, 12월 19일과 20일 네 곳에 걸쳐 마을주민 500여 명이 집단 학살 당하는 비극으로 인해 동지 섣달만 되면 마을은 무거운 침묵과 흐느낌에 잠긴다.

이날 위령제는 가장 희생이 컸던 1948년 음력 12월 19일에 북촌교 마당과 당팥, 현재 일주도로변 소공원으로 조성된 '너븐숭이'(애기무덤)에서 한날 한시에 340여명이 희생당한 날을 잡은 것이다.

김석보 북촌리4.3유족회장(69)은 "돌아가신 4.3영혼들을 위해 저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며 "대통령 사과 이후 '영혼들에 대한 보고서'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과 후대들에게 이 세상에서 다시는 없어야 할 비극의 교훈을 주고 싶었다"이라고 공동 위령제 개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제사라는게 1만원짜리도 있고, 10만원짜리도 있다"며 "그러데 유족들이 모두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이처럼 커지게 됐다"고 말했다.

"절하러 마을 돌면 어느새 파제할 시간돼"

김영수 북촌리장(42)은 "한날 한시에 집집마다 제사를 벌이는 바람에 배례하러 마을을 한 바퀴 돌기 시작하면 어느새 파제시간이 되곤 한다"며 지금도 계속되는 북촌리의 아픔을 전했다.

이성찬 제주도4.3사건희생자 유족회장은 "이제 편안한 안식처에 재단을 마련하고 향을 살라 제를 지내오니 반세기 묵힌 한을 훨훨 풀게되길 바란다"며 "한이 쌓여 가슴저미는 슬픔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에게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일깨워 달라"고 주제사를 올렸다.

▲ 김석보 북촌리4.3유족회장
"현기영씨가 순이삼촌 작품을 구상할때 우리집에서 며칠을 작업을 했어요."

 4.3희생자 북촌유족회 김석보 회장(68)은 1973년 소설이 출간된 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고, 조사받고, 고문받았다는 소식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결국 한국문화예술원장까지 됐다"고 기뻐했다.

당시 한 동안 조마조마한 삶을 보냈던 그는 "현원장이 누구와 함께 작품을 만들었냐는 심문에 끝가지 말을 해주지 않아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는 "댕기(넥타이)도 맬줄 알고 '와이셔츠'도 입을 줄 아느냐"며 농담하는 사이가 됐다.

당시 4.3 사건으로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누이동생과 두 남동생이 목숨을 잃었다는 그에게 아직도 아픔이 남아있다.

 "근처 북촌교 옆 너븐숭이 ‘애기무덤’에 3남매의 무덤이 그대로 있어요."

그는 "4.3의 진상이 규명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93년부터 마을 이장들이 중심이 된 원로회에서 꾸준히 희생자 조사를 한 결과 모두 479명이 희생자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내가 영혼이라도 기뻤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힌 그는 “입이 있어도 말못했던 시절에서 비록 순간이지만 원혼을 달래는 이번 행사가 원혼들에게 진정한 잔치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중을 헤매는 479영령이시여!

오늘은 2003년 12월 19일입니다.

이제부터 56년 전인 무자년 4.3사건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자 이 곳 쓰라린 역사의 현장 북촌초등학교 마당에 정성모아 제단을 마련하였습니다.

4.3사건 희생자 북촌유족회가 제주가 되어 제단에 향 사르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오니 영령들이시여! 저희들의 정성을 받아들여 눈물을 거두시고 강림하여 주시옵소서

1948년 11월 16일 낸시빌레에서 돌아가신 23위 영혼님!
              11월 28일 북서모 벼랑끝에서 돌아가신 부녀자 영혼님1
              12월 19일 이 학교 마당과 당팥.너븐숭이에서 돌아가신 영혼님!
              12월 20일 함덕으로 가서 희생당한 영혼님!
              주정공장을 거쳐 육지부 형무소로 가서 행방불명된 영혼님!

이제 한(恨)을 풀고 재단으로 강림하시어 흠향 하옵소서!  < -초혼사 ->

 '씻기지 않는 원한'...'그래도 영령앞에 꽃 한송이 바칩니다'

고만옥 북촌 유족회 부회장이 초혼사를 올리고 헌화와 분향이 이어지자, 김석보 북촌유족회장의 주제사를 시작으로 신철주 북제주군수, 이성찬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장, 김의남 북제주군의회 의장, 김영수 북촌리장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이날 황요범씨가 지은 장문의 '씻기지 않는 원한'이란 참회록을 그의 딸 황문희(32) 유족이 낭독해 주변을 숙연케 했다.

▲ 황요범 북촌리4.3유족회 총무.

두 살 젖먹이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를 잃었다는 황요범 4.3희생자 북촌유족회 총무(57.인화교 교감)는 당시 민보단이었던 아버지와 숙부를 잃었지만 경찰이었던 외삼촌 덕택에 가까스로 살아났다.

지난 95년 모교인 북촌교에서 근무할 때 부터 4.3 기념비라도 세우자는 의견을 적극 제안하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조차 두려움 때문인지 섣불리 기념비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그 때 동창회에 애기했지만 '시기상조'라며 말렸다.

결국 스스로 '비문'을 쓰고 당시 교장이었던 김종두 전 제주문인협회회장(시인)을 찾아가자 "김 교장은 '너무 이르다'며 걱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북촌 위령제가 열리는 날에는 수년간의 증언과 채록을 바탕으로 그가 직접 만든 '4.3이 남기고 간 북촌사람들의 집단희생'이란 제목의 자료를 나눠주며 북촌 학살의 참상을 알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001년 1월 15일 4.3으로 인해 미처 졸업장을 받지 못한 주민들을 위해 '명예졸업식'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6학년 될 무렵부터 시작해 2-3개월이면 졸업을 눈앞에 둔 이들을 모두 모아보니 돌아가신 분 76명을 포함해 모두 215명이었다"며 "졸업식때 모두가 직접 나오셔서 원을 푸셨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북촌은 마을단위로 큰 희생지역이지만 4.3 흔적지가 남아있지 않다"며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표시라도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지난해 4월에 희생이 컸던 1948년 음력 12월 19일을 기념해 올해 1월 10일에는 너분숭이 '애기무덤'에 방사탑을 쌓고, 위령제를 지낼 계획이었지만 이루지 못했다"며 "정부의 희생자 선정이 마무리되는 내년 이맘때는 꼭 위령비와 위령탑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 씻기지 않는 원한 -

황요범 글 / 황문희 낭독

누가 뭐래도
돌아가신 부모형제가 되살아난다 할지언정
그날의 무자비한 살상 혹독했던 추위와 밤이면 찾아드는 배고픔을 그 누가 씻어주겠습니까?

대통령의 사과도, 그 죽음을 대신할 어떠한 위로도 뼈 속 깊이 스며든 피맺힌 원한과 복받치는 설움을 씻어주진 못합니다.

하늘마저도 울었던 대낮에 무자비하게 저지르던 살상의 행각은 너무나 골 깊은 원한의 상처를 사무치게 하였습니다.
선량하고 순박한 삶도, 뒤집어쓴 누명까지도 당신들에겐 죄가 되어 죽음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대들이 죽음 뒤엔 설움과 한 맺힘으로 반세기를 엮어왔습니다.

4.3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버지(황요범)의 글 '씻기지 않는 원한'을 낭독하는 유족(딸) 황문희씨.
그날의 하늘은 마치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생지옥이면 이보다 혹독하였겠습니까?
그 날의 참상은 무고한 이들에게 총칼을 꽂았으며, 살아있는 자들의 가슴에는 한 맺힌 못을 박아놓았습니다.
절규하던 그 처참한 울부짖음은 아직도 북촌의 들녘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억울한 죽음 뒤에는 저주만이 난무하였더이다.
마을 청년 23명이 운명을 마감했던 동짓달 열엿샛날은 국민총선거에 불참했다는 트집이 전부였습니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끌려나간 이들은 낸시빌레의 형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마을 청년의 비명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대참변의 어두운 그림자는 재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55년전인 오늘 바로 이시간, 이곳에서.
새벽녘에 북촌초등학교 서쪽 신작로 너븐숭이 오르막길에서 함덕리에 주둔하는 군부대로 이송하던 병력 수송차량에 기습을 가하여 군인 2명이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데서 대학살로 이어졌습니다.
폭도의 기습으로 군인 두명의 애석한 죽음에 대한 보복이라기엔 너무하셨습니다.
온 마을을 불 지르고, 4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에 의해 숨져갔습니다.

죽음 앞에 한 마디 거역 않고 유명을 달리하신 영령들이십니다.
이래놓고도 부족하여 서슬 푸른 협박과 감시의 고삐는 잠시도 늦추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삶의 터전과 부모형제를 잃어 동지섣달의 살얼음판에 나앉은 이들에게 폭도의 누명을 씌워 절망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북촌을 칭하여 '폭도마을'로, 애송이들에게 마저 '폭도새끼'라며 손가락질 받는 핍박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무고한 희생을 감수한 영령들이 뭘 알았겠습니까?
좌익이 뉘 편이며, 우익이 뭔지도 몰랐던 그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선량과 순박함으로 한 세상을 사셨던 님들이거늘...
서슬 푸른 죽창 끝에도, 당신들을 겨냥한 총부리에도 인정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젖먹이, 노인, 아녀자를 가리지 않고 총을 겨눈 무법천지였습니다.

끔찍한 대학살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씨를 말렸던 동지섣달의 사태후에도 핍박과 감시는 더욱 거세어져갔습니다.
모든 사실을 왜곡하고서는 살아남은 보시대기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서슬퍼런 관권으로 억눌러 왔습니다.

북촌의 479명의 희생은 다름아닌 4.3진압군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음에도 역사의 기록에는 산 폭도들에 의한 희생이라고 왜곡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거짓도 유만부득이지!
이같은 왜곡된 역사에 학을 떱니다.
거짓을 은폐하고, 불의로 날조된 역사를 썼던 저들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의 철퇴가 내려지려니...
솔직하지 못한 이들!
양민학살도 모자라 생의 자유마저 짓밟아 놓고 잘했노라 나팔 불었던 파렴치한 살인자들!
눈망울을 송두리째 도려내어 까마귀에게 케우려도 맘 풀리지 않으리라.
우리네 민족이 이처럼 잔악하였습니다.

아! 분하다.
심장의 검은 피가 치솟아오름을 어찌할 바 모르겠나이다.
피맺힌 한이 응어리져 어언 쉰여섯 해.
 500명 가까운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어처구니없는 살상의 대학살을 그저 듣고만 자랐습니다.

관권은 무서웠습니다.
북촌 사람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말문에 족쇄를 차고, 서러워할 권리마저 빼앗겨 살았습니다.
동지섣달의 긴긴 추위와 배고픔을 어찌 다 헤아리며, 그 처참했던 기억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계시는 479위 영령들이시여!
살상과 방화와 기아의 노천에서 허우적대던 반세기가 지난 오늘,
저주받은 이 땅에도 정의로운 인륜이 돋아나는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가 바로 흐르려나 봅니다.

정부 차원에서 대통령의 4.3사건의 무리한 진압과 대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습니다.
4.3의 진실한 역사는 살아있었습니다.
정녕, 역사의 본질은 진실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대 사죄와 더불어 대통령의 사과가 진정한 참회의 눈물이 아니고서는
애통한 설움을 씻어 내리지는 못하옵니다.
진실을 밝히고 화합과 상생의 길을 향하는 새로운 역사가 써지는 날 억울한 죽음의 영령 앞에 해원의 꽃 한 송이 올리렵니다.

유명을 달리하신 영령들이시여, 고이고이 영면하소서.

4.3위령제가 열리는 북촌초등학교 교정.

놀이패 한라산의 생생한 역사 증언...'눈물'

이날 제례에 앞서 1948년 섣달 발생한 북촌학살 사건을 소재로 만든 놀이패 한라산의 14번째 4.3 마당극 작품 '사월굿 꽃놀림'(연출 김경훈. 각색 장윤식)을 통해 당시의 참상과 아픔을 떠올렸다.

1948년 음력 섣달 열아흐렛 날. 조천면 북촌리에서 자행된 4.3 학살극의 서막이 올랐다.

▲ 놀이패 한라산이 북촌학살극을 다룬 마당극 '4월굿 꽃놀림'.
전날 밤 밥을 얻어먹으려 마을로 내려온 무장대에게 토벌대원 3명이 사살되자 무장군인들은 이날 오후 2시 북촌교 운동장에 마을사람들을 모아 집단 학살을 시작했다.

무장군 지도부는 "적을 사살해본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적을 사살할 경험을 쌓게 하자"는 명분으로 총살을 시작, 결국 수백명의 북촌리민들이 목숨이 아무 이유없이 스러져갔다.

이날 유족들은 당시 북촌리민들을 대상으로 한 군인들의 '사격 연습'으로 무참히 사살된 현장을 재현하는 모습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마당극은 4.3 사태 평정 후에도 지속된 북촌주민들의 고통을 빼놓지 않았다.

한 주민의 집에서 원혼굿을 하는 날 희생자 가족들이 '아이고 아이고' 곡(哭)을 하면서 울자, 느닷없이 몰려온 경찰들은 ‘빨갱이 위령제'라며 주민들은 연행해갔다.

'다시는 위령제를 지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죽음의 늪을 빠져 나온 주민들의 고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월굿 꽃놀림'은 집단학살사건과 그 이후 북촌주민들이 반세기 동안 겪어온 4.3의 상흔을 생음악과 제주 민요가 어우러지며 생동감 있게 전한다.

오빠를 잃었다는 할머니는 "제사때 마다 영혼이라도 올까 하는 생각으로 어느새 눈물도 말라버렸다"며 "좋은 시대가 돌아와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대통령까지 사과했으니 오늘 제사에서는 곡 영혼이 찾아와서 쉬어갔으면 한다"고 한숨을 지었다.

당시 북촌교 교정에서 살아남은 1943년생 부청하(62)씨는 "영혼들이 좋아할 것"이라며 "입이 있어도 말못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좀더 가쁜마음으로 벗어나  원혼들에게 진정한 잔치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05년 1월 28일 오전 11시 위령성지 제막식

북촌리 유족회는 4.3 당시 희생자가 많았던 북촌리 일주도로변 너븐숭이(현재 소공원으로 조성됨) 희생터에 '4.3사건 희생자 위령성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 위령성지는 주민 스스로 이듬해인 2005년 1월 28일(음력 12월 19일) 오전 11시에 제막식을 갖는 등 십시일반의 힘으로 위령공간을 조성하게 된다.

▲ 4.3 희생자 479 신위앞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유족들.

479위 영령들이시어!
반세기만에 님들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하여 이 제단을 마련하였습니다.
오늘은 님들이 가신지 56년째 되는 엄동설한 섣달 열 아흐레 날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36년간 온갖 착취와 압박 속에서 해방은 찾았으나 나라의 기틀이 잡히질 않아, 미군정하에 주권마저 행사하지 못하던 순간에 같은 민족끼리의 분열과 갈등 속에 위정자들이 저질러놓은  4·3사건!
 이로 인하여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가 아무런 죄도 없이 총과 칼에 맞아 쓰러져 갔으니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젊다는 이유하나로 11월 16일날 민보단원들이 낸시빌레에서 죽어갔으며, 부녀자들을 납치해 무자비하게 서우봉 끝 주기 알에서 죽어 갔습니다.
섣달 열 아흐레 날에는 전 리민 1000여명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놓고 300여 호의 집을 모두 불지르고 전 주민을 몰살하려고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5, 60명 씩 동쪽으로 끌고 가서 총질하여 죽이고, 서쪽으로 몰고 가  죽이고 또 죽이고 하여 오후 4시까지 보복살인극을 자행하다가 군인 대대장이 발포중지 명령이 있기까지 350여명을 총살시켰습니다.
죽다 남은 주민이 그 뒷날 함덕리로 소개해 가서도 검문 검색하면서 수십 명이 연달아 희생되었습니다.
날마다 들이닥치는 탄압에 못 이겨 산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유지하다가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선전벽보를 보고 손들고 내려오니 재판 절차도 없이 때도 장소도 모르게 죽어갔고 더러는 주정공장을 거쳐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어 구천을 헤매는 영령들이 479위십니다.
영령이시어! 이래서도 시국 못 만난 탓만 했고 억울해도 말 못 하고 격분해도 하소연 한번 못하고 사상이랑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살아 나왔습니다.
1954년 1월 13일 전몰 군인 꽃놀이를 하다가 이 곳을 지날 무렵 6년 전 당시를 회상하며 영령에 대한 묵념을 한 것이 죄가 되어 책임자들을 문책했던 사실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억눌려 살아 온지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우리 마을 전직 이장들로 조직된 모임인 원로회에서는 사실이 규명되리라는 믿음아래 1993년 11월에 조사에 착수하여 479명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50세 이상이 107명, 15세 이하가 87명이었으며 학교 교정과 인근에서 희생된 이가 33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사신 앞에는 거역 못하여 밝은 태양은 떠오릅니다.
오늘은 따뜻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지는군요.
제주의 봄은 찾아 왔습니다.
지난 10월 15일 4·3진상보고서가 최종적으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10월 31일에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제주에 오시어 4·3에 대하여 정부로서의 공식 사과를 함으로써 이제 한 맺힌 과거사를 청산하게 되었으므로 가신 님에게 제단을 마련하고 삼가 아뢰옵게 되었습니다.
영령들이시어!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가 권력의 잘 못에 대하여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씀드리고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에게도 추모하고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후속 조치로 우리의 요구를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가신님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위령비도 건립되고 성역화 하여 과거의 아픈 역사를 학습하고 인류의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학습의 산 교육장으로 충족시켜야 할 것이며 양민을 학살한 천인공노할 죄악을 밝히고 명예가 회복됨은 물론 그 보상도 마땅히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에 정부는 유족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성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는 변함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어! 노여움을 푸시고 고이고이 영면하소서
님들이 흘린 피가 미래의 역사 창조에 좌표가 될 것이기에 아픈 역사를 잊어서도 안될 것이며, 왜곡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오늘 민관이 자리를 함께 하여 과거를 반성하고  그 잘못을 용서하고 100만 도민이 화합하여 국제자유도시에 걸맞은 평화의 섬 구축에 초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그리고 리민 여러분,
우리의 원통함과 슬픔을 무엇에 비하리까? 고통이 컸음도 반세기가 넘어가니 잊혀져야할 것이며  용서하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슬픔을 기쯤으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푸는 성숙한 지혜를 보여야 할 때라 여겨집니다.
사상으로 몰리며 사회의 냉대 속에서도 굳건한 의지로 살아오신 여러분!
모두 지혜롭고 정의롭게 화합하며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사회에 봉사하며 지역발전에 기여하는 참된 삶을 살아갑시다.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고맙습니다.
다망하심에도 불구 하시고 이 제전에 참석해 주신 신철주 군수님 고맙습니다.
오늘의 위령제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며 언제나 배려해 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존경하는 김의남 군의회 의장님, 현찬범 조천읍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일일이 존함을 거명해 올리지 못한 점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양해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령들이시어!
고이고이 영면하소서

 -김석보 북촌유족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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