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사람들에게 기차는 미지의 대상이자 매혹의 대상이었다. 기차는 섬에는 없고 뭍에만 있는 뭍의 가치였고 뭍의 이미지였다. 긴 선로를 따라 한반도를 횡단하는 기차는 그때까지 섬이 가지지 못한 근대적 가치의 총아, 그 자체였다.


어릴 적 어린이날이면 삼무공원으로 향하곤 했다. 거기서 박정희가 시혜를 베풀 듯 옮겨온 증기기관차 미카를 보며 기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졌다. 뭍과 섬이라는 지리적 구도 속에서 기차는 뭍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기차의 옆에는 지금도 어린이 헌장이 새겨져있다.


이미 그 기계적 수명이 다한 증기기관차와 어린이 헌장. 그 이질적 사물의 조화가 섬의 아이들에게 뭍의 근대성에 대한 동경을 내면화하고 섬의 가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다면 논리의 비약일까.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기차 안에서 나를 포함한 섬의 아이들은 뭍을 꿈꾸었고, 뭍을 그리워했다.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서 기차가 없는 섬은 박정희식 근대의 설계에서 소외된 대상이자, 근대의 타자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섬은 떠나야 할 곳, 기차가 있는 뭍은 우리가 종국에는 도달해야 될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다.


근대적 산물인 기차를 통해 한반도의 근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책은 기차를 통해 근대적 가치의 확산이 이뤄졌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섬에서 보았던 기차, 그것도 움직이지 않는 기차는 바로 근대의 상징이자 우리가 끝내 이뤄야할 근대적 목표였던 셈이다.


한반도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기적을 울렸던 기차. 단순한 운송수단에 불과한 그것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의외로 많다.
신문의 보급, 경성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가치의 확산. 바로 그것이 기차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선물(?)이었다.(1920년대의 경성모더니즘은 이른바 일본의 영향권 아래 형성되었다. 지방의 모더니즘은 다분히 일본식 근대 카피본에 대한 이중의 복사였다. 지방의 근대에 대한 연구가 중앙 문화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


우리는 기차를 통해 근대를 배웠고, 중앙을 배웠다. 물론 산지항을 왕래했던 군대환이나 뭍을 오갔던 도라지호가 섬과 뭍의 지리적 거리감을 해소하긴 했지만 기차가 지닌 상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반도의 근대를 횡단했던 기차. 그것이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은 섬과 뭍이라는 지리적 간극을 넘어 우리의 내면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섬이 추구해야 할 근대는 결국 섬의 가치가 아니라 뭍의 가치였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박정희식 개발 모델의 시험장이었던 제주도. 관에 의해 주도됐던, 그리고 지금도 주도되고 있는 수많은 개발의 모델들은 섬의 근대성을 섬의 내면에서 찾는 노력이 아니라, 섬의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섬의 부정은 곧 뭍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졌다. 박정희가 시혜를 베풀 듯 기차가 삼무공원에 세워졌듯, 10여년전 중앙 일간지는 까치를 섬에 수입했다. 한국의 상징인 까치가 제주도에 없다는 것은 마치 제주도가 한국적 풍경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들어.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기차로 대변되는 뭍의 가치가 수입되면서 부재로서의 섬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우리 안에 내면화 됐듯 까치는 지금 섬의 산하를 뭍의 풍경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우리의 모습, 섬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섬의 가치에 대한 부정을 섬의 아이들에게 내면화한 기차. 그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부재는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기차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은 뭍의 근대가 변방의 근대를 어느만큼 왜곡시키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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