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이 얼마남지 않았던 저녁, 공덕동 시장의 파전집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일간지 논설위원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논설위원의 새 책 발간을 축하하는 성격의 모임이었던 그 술자리에서, 이라크 파병과 노무현 정권의 실정을 안주삼아 이야기하다 어느덧 화제가 페미니즘 논쟁으로 치달았다.


그때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던 논설위원은 너스레를 떨며 "페미니스트들이 무섭다"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무서운 페미니스트. 평소 진보적 소신을 굽히지 않는 그였기에 이러한 발언은 다소 의외로 다가왔다.
진보진영의 논객들조차도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를 품고 있는 현실. 페미니즘이 진보라고 한다면 이 생뚱맞은 변죽의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학자이기도 한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은 여성에 대한 억압 못지않게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남성 이데올로기, 즉 가부장적 사고를 얼마나 깊게내면화시켰는가를 설파하고 있다.


강원도 시골 마을 출신인 저자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통해 마초의식이 어떻게 남자아이의 머리에 각인되어가는 가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아버지의 밥상은 식구들의 그것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했고, 잠자리마저 아랫목을 차지하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당연하게 여겼던 순종적 어머니.
이러한 가족 구성에서 남자아이였던 저자에게 남성으로서의 이미지는 아버지의 그것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한 발 더 나가, 우리 나라의 가족제도가 결국 국가제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한때 우리가 국부라고 불렀던 인물, 어느 한쪽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독재자이자, 남한내 민족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인물로 불리는 이승만 대통령.< BR>당시대통령은곧국가였다.국가=대통령=아버지로 이어지는 이 도저한 권력의 승계는 곧 우리 사회 뿌리깊은 권위적 가부장제의 한 축으로 작용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곧 국가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유교적 전통과 건국이후 행해진 독재권력의 체제 강화와 맞물린 일그러진 남성상의 흔적은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다.


흔히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에서 남성도 역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만들어진 남성. 그렇다고 저자는 마초적 남성상을 수동형으로 치환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여성에 대한 억압을 피해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성이 여성으로서 길들여졌다면, 남성도 남성으로서 길들여졌음을, 그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만들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여성에 대한 억압의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여성상에 대한 연구 못지않게 마초적 남성상의 형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명절이면 명절증후군을 앓는 여성이 많다고 한다. 가부장적 사고에 길들여진 남성들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남성들이 자기 스스로 마초적 남성상에 길들여져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명절증후군은 해마다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나는 얼마나 국가 권력으로 수렴되는 가부장적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보려고 노력했던가.
올해는 부디, 남성들이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남성이라는 이름으로 차단해버리는 마초적 남성의 틀을 깨트리는 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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