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병안과 한·칠레 FTA 비준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건, 우리 농업의 자주권이 다국적 곡물회사에 좌지우지 됐건, 그것은 일부의 반대의견일 뿐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국익’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렀다.


이번 사건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강력한 자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남한 정부 수립 이후 우리들은 위정자들이 말하는 ‘국익’의 논리 때문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와야 했다. 그들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제주의 10만 인구를 모두 불태워 죽여도 좋다고 말했다. 또‘국익’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은 통과됐으며, ‘국익’을 위해 5·16 군사쿠데타도 성공했고, ‘국익’을 위해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의 용병’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말하는 ‘국익’은 언제나 실체가 모호했다. 피와 살도 없이 두터운 외투를 뒤집어쓴 유령처럼 ‘국익’은 우리 사회를 배회했다. 위정자들은 ‘국익’의 음습한 배회를 조장, 묵인했다. 부당한 정치권력은 언제나 주술사처럼 ‘국익’이라는 유령을 불러냈다. 그리고 우리들은 ‘국익’이라는 유령의 등장에 지레 겁먹고 주눅들어야먄 했다.


그렇다면 ‘국익’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국가가 과연 무엇인지를 검토해야만 한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는 외부와의 구별짓기를 통해 형성됐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국가라는 테두리 속에서 국민들은 동일한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개별성을 가진 개인의 존재는 사라지고 국민이라는 균질화된 인간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국익’을 위정자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익이라고 착각해왔던 것도 바로 이러한 국가 장치가 우리 내면에 그려놓은 허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국가가 만들어 놓은 허상을 개인이 허물어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영원히 ‘국익’이라는 유령의 등장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나 되풀이되는 위정자들의 ‘국익’타령. 그것의 실체를 똑바로 보지 않고서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국가에 의해 이름 불려지기를 기다리는 국민만이 존재할 뿐이다. 국민이길 포기하는 것, 그것만이 ‘국익’이라는 유령의 심장에 십자가를 박아놓을 수 있는 무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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