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絹本彩色. 24.5×21.8 cm)

우리나라 미술사를 가르치다보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를 빼놓을 수 없다.

천산대렵도는 말을 타고 달리는 두 인물을 사선 방향으로 배치하여 그린 그림으로 인물의 움직임, 달리는 말의 모습 등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말의 모습은 웅장하고 기상이 넘치며 살짝 그려진 나무도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의 들판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취미로 그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작품이다.


공민왕 -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1∼74). 충숙왕의 둘째 아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에 봉해졌다가 1351년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기 전 10년이란 세월을 원나라에서 보냈는데 어린 마음에도 원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싹 텃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의 '혼인정책'에 의해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비록 강제적인 결혼이었지만 공민왕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노국공주를 깊이 사랑하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원나라 배격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당시의 고려 사람들은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 몽고식의 변발(머리 꼭대기의 털만을 길러서 땋아 늘이는 것)과 호복(몽고식의 옷)을 입고 생활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엄한 명령으로 몽고의 풍습은 점점 사라졌고 백성들 사이엔 자주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부패한 귀족들을 몰아내기 위해 토지를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고 죄 없이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백성들로부터 크게 칭송 받았다.

그러나 공민왕은 사랑하던 노국공주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정치에서 손을 떼고 모든 일을 신돈에게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오직 죽은 노국공주만을 생각하며 그림 그리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되자 나라는 안팎으로 다시 시끄러워졌고 큰 권력을 쥔 신돈일파의 횡포와 홍건적과 왜적이 자주 쳐들어와 백성들은 다시 살기 어려워졌으며 정치는 문란해졌다.

그 무렵 왕실 안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 공민왕은 최만생, 홍윤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나라의 자주정신을 되찾고 새로운 정치를 펴려던 공민왕은 이렇게 어이없게 생을 마감했다.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는데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한 점뿐이다.


이 그림은 원대 북화의 영향을 받은 필치를 보여준다.
이처럼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격하고 몽고의 풍습을 몰아내는 정책을 폈으나 정작 그림 속의 인물은 변발의 머리로 들판을 달리고 있으니 무슨 아이러니인가.
천산대렵도를 설명하기가 난감해진다.
공민왕이라는 한 인간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며.....현시대의 위정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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