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경리 선생님으로부터 노구치 토요코(野口豊子. 61세) 시인이 편지를 받은 것은 1992년 9월이었다.

일본어로 또박또박 쓰신 만년필 필체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원고지에 실례합니다만 이십여년 거의 편지를 쓰지 않았으며 산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생활이기 때문에 격식에 맞지 않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일부러 편지까지 주셔서 송구스럽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초조하고 번거로운 일입니다. 특히 편지인 경우 암중모색 같아서 무척 고통스럽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아니면 관련된 일로 무엇인가 말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8월 한달은 아주 바쁜 계절이었습니다. 고추 수확과 배추씨 파종 등 잡초는 폭발적으로 번식하고 거기에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급자족이어서 무척 불편하고 어리석은 일상입니다.

나쁜 습관입니다만 완전히 혼자가 아니면 글을 쓸 수 없고 생각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얘기는 노구치 씨께 대해서 변명입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박경리. 노구치 토요코 씨>

노구치씨는 1992년 8월 9일(일) 일본 산케이 신문 조간에 박경리씨의 (토지)에 대해서 썼다. (여성 작가에의 여로(旅路)라는 시리즈 기사였다.

산케이 신문사에서 시인 김시종선생님께 한국의 여류작가에 대해서 쓸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김시종씨는 바로 노구치씨에게 연락을 하고 갖고 있던 일어 번역 소설(토지)를 주면서 박경리씨에 대해서 쓰기를 권했다.

그래서 노구치씨가 쓰면서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박경리씨의 근황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바로 박경리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내용을 전했다. 1992년 8월 초순이었다.

박선생님께서는 당시 일본어로 번역된 (토지)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털어 놓으시면서 9월부터 (문화일보)에 (토지) 완결편을 연재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산케이신문에 (토지)가 크게 소개 되었다.

필자는 그 신문과 노구치씨의 편지를 박경리 선생님께 보냈다. 그 회답이 앞에 쓴 편지 내용이었다. 노구치 시인은 1960년대 말 오사카 문학학교 수강생일때 당시 강사였던 김시종선생과 만났다.

그후 현재까지 약 40년동안 사제지간을 떠난 교류속에서 지난해 11월 김시종시인의 (재역 조선시집)을 발행할 때 많은 이바지를 했다.

노구치 시인은 문예서의 기획.편집을 전문으로 하는 (모즈 공방<工房>)을 운영하면서 1999년 6월에 (김시종의 시. 또 하나의 일본어)라는 주제 속에 (언어가 있는 장소)의 심포지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2000년 4월 상기 제목으로 출판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람: 纜)이라는 동인지 소책자를 12호까지 발행했다. (람)은 배를 묶는 밧줄을 의미하는데 이 책에 김시종 시인은 윤동주의 시와 김소운씨가  일본어로 번역한 (조선시집)속의 작품들을 재번역했다. (이 난에서 필자가 "시인 김시종"에 씀)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모즈공방"에서 2004년 김시종 시인 번역으로 발행되었으며, (재역 조선시집)은 작년 이와나미서점에서 발행되었다.

그 동안 윤동주시와 일제시대에 발표된 시인들의 작품은 일본어 번역으로 종종 나왔었지만 그 번역들은 원시(原詩: 한국어)에 가까운 번역이 아니고 일본어에 맞춘 짜깁기 번역예가 많았었다.

김시종 시인은 시인으로서 원시에 가까운 번역을 하므로써 그 시의 참된 진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모즈공방"에서 노구치 시인이 책임편집자로서 발행한 동인지 (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재역 조선시집)에는 노구치 시인의 제안으로 상단에는 일본어 하단에는 한국어 원시가 대역으로 게재되어 한국시를 좋아하는 독자만이 아니고 한일 양국어를 공부하는 독자들에게도 더없는 교과서가 될 것이다.

노구치 시인은 시집(초속: 草束)과 (하늘은 있었다) 두권을 냈으며 (초속)에서는 김시종 시인이 발문을 썼다.

이 외에도 시는 물론 평론, 에세이도 발표하고 있다. (하늘은 있었다) 시집에서 (모델)이라는 시 한 편을 필자 번역으로 소개하겠다.

             모델

고생과 불안의 차이/당신은 아세요?/긴 의자에 기대여/여자가/중얼거린다/놀라운 말(言)도 있었어요/푸른 모습이 되어서/여자는/ 그림 속에 앉았다/그것뿐/지금도/무릎 위에서 굳게 맞잡은/여자의 손/허리의 곡선은/약간 비틀고/입가에/미소를 남기고 있다/눈을/크게 뜨고 있다/모델의 여자/화면 옆에/은색의 그릇이 놓여있다/꽃병의 꽃과/5월의 바람과/그려져 있는 것은/사람들의 깊은 잠이다.

재일동포사회 속에서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노구치 시인의 공헌을 높게 평가하고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산케이신문을 박경리 선생님께 보냈을 때 필자에게 꼭 한번 원주에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무척 애석하다.

이 원고를 쓸때 쿄토에 거주하시는 김명희(59) 화가로부터 박경리 선생의 시(옛날의 집)을 인터넷으로 보내주셨다. 향토색 짙은 시로서 박경리 선생의 삶이 그대로 시였다.

김명희씨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33년간 쿄토에 사시면서 피스마스크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오는 6월에는 미국에서 전시회를 갖을 예정이다.

김시종 시인, 노구치시인, 김명희 화가와 함께 지난 5월 5일 타계하신 박경리 선생님의 명목을 비는 바입니다. <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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