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보듬다

▲ 용담 지석묘 5호.
옛 사람들의 ‘영혼의 집’인 고인돌(支石墓)은 1971년 제주도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제까지 지정된 것은 용담동 지석묘 1~6호를 비롯하여 오라, 도련, 삼양, 외도, 광령, 하귀, 창천 등의 것들이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타난 것들은 심지어 가파도 같은 섬의 것까지 포함하여 100여기에 이르고 있으며, 최근에도 야산 지대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있어 그 수를 더하고 있다.

이집트나 멕시코에 피라미드(Pyramid)가 있다면 제주도에는 지석묘가 있는 셈이다. 피라미드의 조성 연대가 BC 3000~2900년인데 비해 제주도의 고인돌은 탐라 전기인 AD 0~500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시대에 지금보다 훨씬 영혼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고인돌의 축조는 일정한 인구의 규모, 이에 따른 취락 형성과 본격적인 농경으로 인한 협업체 구성, 불평등 사회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출발한다.

제주도 고인돌의 형식은 크게 매장부의 위치와 지석의 고임 방식을 분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즉 시신을 지하에 매장하는가, 아니면 지상에 매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지상형은 키가 높은 지석을 사용하고, 지하형은 키가 낮은 지석을, 그리고 중간형인 반 지상형의 경우는 상석 양 모서리에 작은 지석을 고여 아치 모양을 만들거나 어떤 것은 한쪽을 들리게 하고 다른 쪽에 낮은 지석을 고였다.

또 하나의 분류 기준은 매장 상부에 지석이 있냐 없냐 하는 것이다. 만일 고였다면 판석형 지석이냐 아니면 괴석형 지석이냐도 중요한 분류 방법이 된다. 즉 두툼한 괴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보다는 키가 높은 판석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보다 복잡한 구조다.

이런 지석의 고임 상태와 매장시설의 위치를 가지고 제주도 고인돌을 분류하면 대략 여섯 가지 형태로 나눌 수가 있다.

1)지석 없이 상석이 지표에 바로 닿는 개석식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 2)남방식 유형에 속하나 지석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경우. 이때 지석의 숫자는 3~10매로 그 예가 다양하다.

3)상석 한쪽이 들리어 아래쪽 매장부가 땅 위에 드러나 있고 그 좌우와 들리지 않은 뒤쪽에 지석을 고인 형식. 4)지석을 이중으로 고이고, 비탈면을 이용하여 한쪽은 작은 깎은 돌들을 고인 경우.

5)비탈면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깎은 돌과 괴석을, 낮은 곳은 판석을 고인 형식. 6)상석 아래는 완전하게 판석형 지석으로 에워싸 고여있는 형식으로 지상에 장방형 혹은 원형의 석실을 만든 형식. 이상의 1, 2형식은 매장부가 지하에 있으며, 3, 4형식은 반지상형일 가능성이 높고, 5, 6형식은 지상형으로 정리된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를 가름하는 것은 부장 유물을 통해서이다. 한반도 고인돌에서는 갈아서 만든 돌칼과 비파형 동으로 만든 칼등이 있는데 이런 유물의 연대는 대체로 청동기시대(BC 1000년~300년)부터 초기철기시대(BC 300년~0년)까지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시기적으로 앞선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아 그보다 다소 늦을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면 이런 고인돌 속에 묻힌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학자들은 돌을 움직일 다수의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일정한 권위에 의해서 강제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 자발적인 협업 체제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용담 지석묘 6호. (이상의 사진들은 <제주의 문화재>에서 인용했음)

광령리 10호 고인돌의 경우 무게가 약 15톤 가량 될 것으로 보여 이 고인돌의 운반 과정에 성인 남자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100Kg으로 잡을 때 이 한 기의 고인돌을 옮겨오고, 쌓는데 필요한 인력을 150명 정도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4~5인 가구에 한 사람의 성인 남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이 고인돌의 축조 당시 650~800명의 인구가 고인돌 인근에 흩어져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인돌의 분포와 같은 시기의 토기가 나오는 정도에 따라 탐라 전기에 한라산 북쪽의 용담동을 비롯하여 오라동 일대와 광령리, 고내리, 귀일리, 곽지리, 옹포리 일대에 각기 규모를 달리하는 거주 집단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한라산 남서쪽에는 일과리, 동일리, 화순리, 창천리 일대와 남동쪽에 신례리, 신천리, 신풍리, 신산리 일대에 크고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어 그 시대의 지도를 대충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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