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목마장(牧馬場)

삼별초의 군대를 쳐서 이긴 연합군들은 바로 물러갔으나 유독 몽골군의 장수 흔도( 都)만은 500명의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불법으로 탐라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 섬을 교두보로 삼아 일본을 공략할 계략을 품고 있었는데, 그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몽골, 곧 원은 불과 한 달 후에 점령한 지방을 관리하는 관리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탐라에 파견한다.

이에 앞서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선 1,000척을 짓도록 고려 조정에 명령했는데, 그때 원은 국제적으로 지금 미국과 우리 나라의 관계처럼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탐라를 점령하자 이번에는 여기서도 전선 100척을 짓도록 지시했다. 당시 이 섬의 인구라야 단 1만200여 명으로 백 척의 배를 짓는다는 것은 감당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점령지의 백성이 어찌할 것인가. 한라산에서 나무를 벌목하여 내려오고, 조선공사에 동원된 까닭에 생업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몽골, 전략적 요충지로서 탐라 중시

 원에서는 고려 조정에 탐라에 주둔한 몽고군과 백성들의 식량을 포함하여 4만여 석을 탐라로 보내도록 조치했으나 백성들 중에는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여 육지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도망간 탐라 사람을 찾아내는 임시 관직까지 생겼는데, 그것이 '탐라도루인물추고색(耽羅逃漏人物推考色)이라는 길고 장황한 이름이다.삼별초가 패망한 이듬해인 1274년 6월에 원나라에서는 탐라 초토사(招討使)로 실리백(失里伯)을 보내고, 탐라에서 모시포(苧布) 100필을 거둬갔다.

이해 고려 원종(元宗)이 승하하자 연경에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 심(諶)이 연경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렬왕(忠烈王)이다.이 후부터 원은 제주에서 진주와 향장목(香樟木), 고양이 등 짐승의 가죽을 약탈해 갔다.

1276년(충렬왕 2년) 7월에는 초토사를 식민지 통치에 적합한 이름인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라고 고치고, 다루가치의 우두머리도 탐라치(塔刺赤)로 바꿨다. 그리고 말 160필을 들여다가 지금 성산읍 수산리 경인 수산평(首山坪)에 풀어놓았다.

 그보다 앞서 고려 문종과 고종 때인 1073년과 1258년에 각각 탐라가 고려에 말을 공물로 바친 기록이 있어 소형 말인 과하마(果下馬)가 사육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때부터 호마(胡馬)를 이 섬에서 키우기 시작했으며, 한때 "말은 낳거든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낳거든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은 여기서 기인했던 것이다.

다루가치 파견 수산평 목마장 조성

탐라는 사면이 바다로 에워져 있고, 광활한 목장이 있으며 맹수마저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목장은 없었다. 그들은 말이 번식하기 시작하자 한라산 기슭 동서 쪽에 말을 관리하는 아막(阿幕)을 설치하여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 벼슬의 사람에게 책임을 맡겼다.

군민총관부라는 명칭은 한때 '군민안무사(軍民安撫司)'로 바꾸기도 하는 등 도민들에게 회유책을 썼음을 알아보게 한다. 그러다가 1286년(충렬왕 12년) 5월에는 몽골병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대신 고려군 1,000명을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 시대 탐라에 주둔했던 다루가치들의 횡포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루가치 중에 탑아치(塔亞赤)는 심지어 전라도까지 사냥을 나가는 등 유목민의 성정을 드러냈으며, 그 때문에 백성들이 동요하기도 했다.

홀도탑아(忽都塔兒)는 고려 조정에 청자 항아리와 청자병 등 귀물을 요구하기도 했다.탐라에 주둔한 다루가치들은 심지어 고려 조정에도 영향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들 세력의 막바지인 1285년 11월에는 충렬왕이 정전(正殿)으로 불러 향연을 베풀어준 일도 있었다.

멋대로 학정을 한 다루가치도 있었기 때문에 고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원나라에 알려 1292년 3월에 우승(右丞) 아철(阿撤)이 탐라까지 와서 죄를 묻고, 지금의 월남인 교지(交趾)로 귀양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백성들 삶이 오죽했으랴. 원의 주둔 1세기 동안에 탐라의 장정들은 바다를 건너 도망칠 기회만을 엿보며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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