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부암
언젠가 고산을 지나며 바다 빛이 너무 고와 잠시 멈췄던 곳이 있다.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은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라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열녀들은 가문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가 바로 곁 몇 그루의 나무에 둘러 싸여 있는 좁은 돌계단을 오르니 정방형의 바위가 보인다. 글 사이마다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을 털어 내니 절부암이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들어 났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깊이로 새겨진 절부암이라는 글씨는 아주 반듯한 전서체이다. 획이 너무 반듯한 것이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의 글씨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예의 전서의 부드러운 곡선과 비교해 볼 때 현대의 고딕체처럼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서예에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서툰 그림처럼 상형을 더듬을 수 있는 전서의 추상성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절부암(節婦岩)

남편 姜士喆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처 高氏가 바다를 보며 며칠을 통곡하였더니 그 시신이 그 앞에 떠내려왔다고 한다. 장례를 마친 고씨는 바다 기슭에 있는 나무에 목을 메어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바로 그 장소에 강사철의 처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 마애명이다.
고종 6년 제주 판관 신재우(愼載佑)가 그 절행을 표창하였다. 이에 따라 동수(洞首)

▲ 강사철의 처가 목을 메었다는 나무.
인 김응하(金應河)가 글씨를 쓰고 이팔근이 새겼다. 오현단 마애명과 달리 동치(同治)라는 청나라 연호를 썼다. 관청이 공식사업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동치 정묘(同治 丁卯)는 고종 4년(1867)이다. 자평삼(子平三) 세 글자가 연호 곁에 새겨져 있는데 판관 신재우의 자가 아닌가 한다.
옥의 티라면 절부암이라는 글자 위쪽에 동수와 새긴이의 이름이 있음이다. 아래나 옆쪽에 겸손하게 그들이 이름을 넣었더라면 훨씬 모양새가 좋았으리라. 그 무지함 때문에 이들은 3년 간 관노(官奴)살이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절부암은 바닷가에 접해 있어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을 포장하여 작은 공원처럼 꾸며놓았고 해안도로가 인접해 본래의 맛을 잃어버린 듯하여 아쉽다.

130여년 전 그 여인이 눈에 비친 바다는 어땠을까?

혼자 남겨진 그 여인에게 바다는 원망스러움 그 자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 남편의 죽음도 모두 여자 탓이라는 손가락질 받았을 터이니 그 여인에게 죽음 외의 선택이란 없지 않았을까?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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