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원당사 터에 위치한 불탑사 ⓒ김영학기자
수정사 인왕상 "고려시대 최고 걸작"

제주시 삼양동 원당사지(元堂寺址) 부근에는 지난해 10월부터 원당사지 발굴 복원사업이 제주시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국비와 지방비를 포함하여 8000만원을 들이는 이 공사는 요사채 일부만을 발굴해 놓은 채 발굴 예정지 안에 무덤이 5기나 들어있어 중단된 상태이다.

여기 오층석탑은 제주 현무암을 소재로 만든 것으로, 기단 부와 5층의 탑신 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석탑의 뒷면을 제외한 3면의 기단면석에는 안상(眼象:무늬곽)을 새기고, 안상 내부에는 밑으로부터 솟아오른 꽃을 새겨놨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절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왕비 기황후(奇皇后)의 발원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전해오는데, 그녀는 본래 고려 기자오(奇子敖)의 딸로 원에 공녀(貢女)로 들어갔다가 미모가 아름답고, 총명한 데다 음식솜씨까지 뛰어나 순제의 귀여움을 받았다.

게다가 태자를 낳게 되자 제2황후로 책봉되어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다.
그녀가 동해 중에 세 개의 봉우리로 된 길상지(吉祥地)를 택하여 절을 짓고 나라의 융성을 빌게 하였다는 곳이 여기로 전해온다. 원당봉(元堂峰)이라는 이 오름의 이름마저도 여기 절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니 이 절의 영향을 알아볼 만하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발굴작업이 제대로 이뤄지면 보다 분명한 절의 규모와 유물들

▲ 불탑사 5층석탑 ⓒ김영학기자
을 알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원당사와 함께 고려시대의 큰 절로 서귀포시 하원동의 법화사(法華寺)와 제주시 외도동의 수정사(水精寺)가 있다. 몇 년 전에 발굴이 이뤄져 복원된 존자암(尊者庵)과, 묘련사(妙蓮寺) 등도 고려 시대의 절이다. 위의 네 절 중에 묘련사를 제외한 세 절은 모두 발굴이 되었는데, 특히 법화사의 경우 대웅전 자리 일부만을 발굴한 상태에서 복원작업을 서둘러 아쉬운 바가 있다.

필자는 1982년 법화사지를 발굴할 시초에 현장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동쪽 기단이 물리적인 힘에 의해 쓰러뜨려진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절은 서귀포시 하원동107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1년 제주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원당사, 수정사와 함께 고려시대 제주도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조선조 초기에는 비보사찰(裨補寺刹 : 나라를 수호하는 사찰)로 노비를 280명이나 두고 있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고려 전기에 창건되어서 후기에 크게 고쳤으며,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증, 개축된 것이 확인되었다.

발굴 결과 유물로는 운용문(雲龍文), 운봉문(雲鳳文)의 막새와 각종 기와류, 백자와 중국도자기, 개원통보(開元通寶) 등이 출토되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으나 기와 중 “至元六年己巳始重創16年己卯畢”이라고 새겨진 것이 있어 원종 10년(1269) 이전에 창건되어 고려 충렬왕 5년(1296)에 중창된 것임을 알아보게 한다.

수정사지는 제주시 외도동 499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최근까지도 그 근처 밭 돌담에서 기왓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역시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130여 명의 노비를 갖춘 비보사찰로 도내에서 법화사 버금으로 큰 사찰이었다.

이 절만 해도 한때 스님들이 사용하는 배가 제주목사의 배보다도 크고 튼실해서 육지를 오가는데 빌어 썼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오현(五賢)의 한 사람이었던 충암(沖庵) 김정(金淨)의 ‘都近川水精寺重修勤文)’에 따르면 이 절은 조선조 중종 16년(1521)에 중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 결과 건물지 12동과 탑지, 석등지와 수막새, 특히 금동제품과 청석다층석탑 면석에 음각된 인왕상(仁王像)은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화공을 시켜 그리게 한 <탐라순력도> 중의 건포배은(巾浦拜恩) 부분에 보면 이 목사 자신이 한라산 기슭의 신당(神堂) 열군데를 불태우는 상징적 그림이 나타나 있다.

그는 임금의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당시로서는 대대적인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절 500, 당 500’을 불태우고, 중들과 무격들을 다시 농사 짓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법화사나 수정사도 이 무렵에 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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