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총재선에서 압도적인 지지속에 당선된 아소오씨가 일본 제92대 수상에 지명됐다.

자민당 총재선에는 모두 5명이 출마했었다. 소화시합과 다름없다는 빈축속에 학생들의 수학여행처럼 버스와 열차 비행기를 같이 타고 전국 유세를 감행했다.

예상된 승리속에 아소오씨의 득표수와 2위는 누가 될것인가에 화제가 모아졌다. 왜냐하면 고이즈미 전 수상이 5명의 후보자는 모두 자기가 수상 재직시 등용했던 각료였기 때문에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선거가 중반에 들어섰을 때 고이즈미 씨는 유일한 여성후보 고이케씨 지지 선언을 했다. 대동소이한 네 후보의 정책과 달리 고이케 씨는 고이즈미 개혁 노선을 계승한다는 선언 속에 선거에 임했었다.

선거결과 아소오씨의 압승과 고이케씨는 지방대의원의 표 한표도 획득 못한 참패로 끝났다. 국회의원 표 46표로서 3위로 끝난 고이케씨의 결과는 고이즈미씨의 개혁노선의 반대를 의미했다.

아소오씨가 수상으로 지명된 후 각료 등용에 있어서 그 흐름은 더욱 뚜렸했다. 고이즈미 수상 당시 <우정민영화> 반대를 부르짖고 탈당을 했던 여성 국회의원 노다씨가 복당후 후쿠다 내각에 이어 계속 대신에 유임됐다. 자민당 4역의 하나인 정무조사회장에도 <우정민영화>에 반대했던 호리씨가 역시 유임됐다.

아소오 수상마저 고이즈미의 개혁 노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위상과 입지가 좁아진 고이즈미씨의 동향을 주시하는데 그는 선수를 쳤다.

내각 발족 다음 날 고이즈미씨는 갑자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수상재임시 모든 정력과 정열을 쏟았기 때문에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기 사명은 완수했다는 것이 은퇴 이유였다.

눈 앞에 닥친 중의원 해산후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그의 은퇴 선언에 그만이 갖고 있는 정치 미학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일각에서는 그가 수상 재임시 추진했던 정책들의 공죄가(功罪)가 막 현실화 되는 과정에서 적전도망이라는 비판도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난은 정계 은퇴와 함께 자신의 선거구를 27세인 차남에게 물려주겠다는 발언이었다.

세습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나 몰라라는 식으로 아들에게 대를 잇게 한다는 것이었다. 고이즈미씨는 조부시대부터 세습 정치인으로서 4대째 이어지는 셈이다.

일본의 폐쇄적인 정치 개혁을 위해서 자민당을 파괴시키는 한이 있어도 개혁을 하겠다고 부르짖었던 그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세습 타파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왕국을 지킨 보수 정치가 였다. 자기 모순이다. 16명의 아소오 내각에는 조부와 부친이 수상이었던 대신이 4명이고 2세 의원은 10명이다. 우경화의 보수정치가 계속되고 있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로(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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