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곳이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구춘화를 볼 수 있는 등영구이다. 제주도에 왔던 목사나 풍류객들에겐 놓칠 수 없었던 풍광이다. 한켠에 널마루 같은 평평한 암반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술 한잔에 시 한 수 읊조리는 풍류를 즐기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으랴. 그 많은 세월동안 제주도를 거쳐간 옛사람들의 흔적인 마애명이 유독 많은 이유를 알만하다. 얼마전 이 곳에서 음악회가 열렸다는데 아마 그 시절의 풍류객처럼 소리로 신선을 불러봄인지도 모르겠다.
등영구(登瀛邱. 속칭 들렁귀)
이 곳에는 마애명이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서 신선을 찾아가는 문[訪仙門]과 신선을 부르는 대[喚仙臺]가 대표적인 마애명이다.
방선문은 누가 쓰고 새겼는지 기록이나 구전이 없으며 환선대는 정조 2년(1778)에 목사로 왔던 김영수(金永綏)의 필적이다.
방선문 일대는 마애명으로 뒤덮여 빈 바위가 없을 정도이다.
이 곳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명은 김치(金緻 : 광해군 원년. 1609.)의 시이다. 어쩌면 제주도에서 가장 오랜 마애명일 수도 있다. 이름자 중에서 치(緻)자만 전서(篆書)로 썼는데 석면이 구멍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에 시를 지어 남긴 많은 시인들 중 영초는 김병필(金炳弼)의 호로 일제강점기 초에 모슬포에 살았던 시인임이 밝혀졌으며 그의 시집은 제주교육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응상도 일제강점기 초까지 거로, 화북에 살았던 인물인 듯 하나 자세한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많은 이름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영주산에 살고 있다는 신선이나 기억하고 있으려나.
자신의 이름자를 후세에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이 남긴 마애명. 글씨가 좋고 시가 뛰어났다면 좋은 경치에 보탬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옥에 티가 될 수도 있다.행여 이곳에 있는 마애명을 보며 거기에 자신이 이름자를 더하려는 자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思菴의 시 한 수 소개해 본다.
亭臺溪巖皆有名號刻石其上因感而腑之
정자의 축대와 시내의 바위 위의 돌에다 이름자를 새겨 놓은 것을 보고
鏤字巖阿勞費日
바위 위에 수고롭게 이름자를 새길 때는
擬將悠久與天期
저 하늘이 끌날 때까지 남기고 싶어서였겠지
堪嗟一瞬隨灰劫
아! 한 순간의 재앙이 닥쳐
川山湮後孰知
시내가 별안간 산을 막는다면 누가 알아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