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 발행하고 있는 <스포츠 닛퐁>신문에 장훈 선수의 <하리모토 이사오의 와가미치 :張本勳の我が道> <하리모토의 나의길>이 18회에 걸쳐 연재되어 지난 금요일 (11월 28일) 끝났다.

<무슨 관계로 지금 하리모토 선수를 연재하고 있습니까> 필자의 질문에 신문사 담당자는 <스포츠 닛퐁>신문의 야구평론가이기 때문에 연재하고 있다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책으로 내주기 바란다는 요청도 있다고 덧붙였다.

현역선수를 은퇴해서 27년이 지난 장훈 선수가 당신문의 평론가라지만 이러한 기획은 아주 드문일이었다. 그의 일본 야구계 위상을 재조명하는 연재였다.

194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장훈 선수는 네살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동네아이들과 남의 밭 고구마를 캐다가 자주 구워먹었다.

둑길에서 어느날 구워 먹을 때 후진으로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어 오른쪽 손이 불더미에 묻혔다. 엄지와 두번째 손가락이 안으로 휘어져 버리고 가운데 손가락 반과 네번째 손가락 삼분의 일이 잘려 나가고 새끼 손가락은 없어져버렸다.

다음해에는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피폭의 피해를 입고 지금도 <피폭수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장애 속에서도 그는 완력이 세어서  학창시절에는 어느 사이엔가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직접 싸움판에 들지 않지만 언제나 주동자로 몰리는 바람에 야구 실력이 있는 장훈 선수였지만 히로시마에서 고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장훈 선수의 형님과 주위 사람 노력으로 오사카나니와고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이유없는 문제아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고교 야구의 성지 코오시엔에 출전할 수 없었다.

가장 가혹한 학대는 장훈 선수가 재교중인 야구감독이 조선인 멸시로 인한 코오시엔 출전 방해였다. 이때 처음으로 조센징 차별을 뼈아프게 느꼈다고 했다.

고교 재학중에 자이언트 입단 요청이 있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만은 졸업해야 한다는 형님의 조언에 포기하고 졸업후 프로구단에 입단했다.

안타제조기라는 이명속에 그후의 장훈 선수의 활약은 이치로 선수가 지금 목표로 하고 있는 전인미답의 3085 안타를 기록했다.

2007년 10월 5일 한국정부는 장훈 선수에게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1976년 자이언트에 이적한 장훈 선수는 나가시마, 오선수와 1979년까지 선수생활을 같이 했다.

그는 이때를 나가시마 선수를 장남, 오 선수를 차남 자신은 삼남이었다고 술회하면서 이 관계는 지금도 다름없다고 했다.

네살때 오른손의 큰화상으로 불구의 장애자가 되고 다음해에 피폭속에서도 야구에 대한 정열과 신념을 굽히지 않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 놓았다.

코오시엔 출전이 좌절되었을 때 자살까지 생각했었지만 그러한 자기를 구해 준것은 재일한국인 고교야구선수팀의 선수로서 한국 원정이었다고 했다.

롯데구단에서 선수 은퇴할때 감독요청이 있었고 그후 자이언트에서도 코치 요청이 있었지만 모두 사절했다면서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지난 올림픽때 한국의 금메달은 더없는 기쁨이었지만 자기를 야구선수로 키워준 일본은 참패로서 끝나서 착잡한 심정이었다는 장훈선수, 그러면서 아시아가 하나가 되어 미국야구와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비록 유니폼은 벗었지만 야구계의 임원으로서 계속 활동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로(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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