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교양 ‘MBC스페셜’이 22일 방송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특집으로 다룬다. ‘우리 시대 목자, 김수환 추기경’을 알아본다.

김 추기경은 종교지도자를 넘어 우리 국민의 큰 어른으로 자리했다. 1970~1980년대 민주화 열망의 한가운데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가난한 시골 소년이 추기경이 되어 격동의 시대를 감싸 안고 살기까지 ‘인간 김수환’을 조명한다.

◇본당 신부 시절의 김수환

김수환 추기경은 본당 신부 시절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단편으로 꼽는다. 53년 성직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면서 정기적으로 제작들과 만나며 끈끈한 정을 나눴다.

김 추기경은 가난한 신자와 학생에게 몰래 돈을 나눠주었던 따뜻한 신부님이었다. ‘학생들과 장난치며 노는 교장선생님이 어디 있냐’며 수녀님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신부 시절 김수환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좋은 신부님이 오셨다고 보러 갔는데 인물도 없고 얼굴은 시커멓고, 우리가 ‘뭐, 저런 사람 뭐 좋다 그러나’ 하고 생각했어요”(안동 본당신부 시절 신자), “별명은 인자한 콧님. 이야기 할 때 웃으면서 코가 먼저 벌렁벌렁 거려요”(김천 본당 시절 제자)

◇민주화 운동과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1969년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당시 나이 47세,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이 된 그는 가톨릭교회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며 소외된 이웃을 보살폈다.

정치권력의 공작과 탄압, 교회 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다. 역사적 순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70년대에는 정치적으로 탄압 받는 인사들의 인권과 정의 회복을 위해 일했다고, 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온 몸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려 했던 김 추기경을 두고 조광 고려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남긴 인물. 김수환 추기경의 행동에는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김 추기경은 장애인과 사형수, 철거민과 빈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 소외된 이들을 돕는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을 늘리는 데에 힘을 쏟았다.

추기경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안아주고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같이 울면서 그들을 보듬어 안아 주었다. 울음으로 토해내는 당시의 절박했던 증언들, 그들이 본 김 추기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향의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가 위로해주는, 딸을 위로해주는 그런 심정으로 그냥 눈물이 나서 울었어요”(방직공장 노조위원장), “‘잘 잤느냐 춥지 않았느냐 아픈 사람은 없느냐 밥은 제대로 먹었느냐’ 추기경님이 부둥켜안고 힘내라고 위로해주는 이런 모습들”(상계동 철거민), “추기경님이 꼭 살려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죠. 매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해내실 수 있을 분이라고 생각했어요”(정치사형수의 아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김 추기경의 삶의 주제는 인간이었다. 정치인이나 높은 사람들은 그를 찾아왔지만,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직접 찾아다녔다. 추기경이 된 이후에도 인간에 대한 애정은 변하지 않았다. 인권과 노동자, 민주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인간을 향해 있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지만 스스로를 늘 부족하다고 여겼던 김 추기경이다. 소외 계층과 직접 함께하지 못함에 늘 미안해했다.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함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생전 이렇게 고백했다. “언제나 나에게서 큰 주제는 인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어떤 사회 전체가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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