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 27년 탐라명마 진상 기록

우리 나라의 말 사육 두수는 지난 85년에 3,009마리, 90년에 4,937마리, 95년에 6,215마리로 10년 동안에 2배 이상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95년 제주 지역의 말은 4,222마리로 전체의 63%나 되며,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11,366마리나 되어 날로 늘고 있는 추세다.

그 중 제주말은 7,534마리이며, 호마(더러브렛)가 3,263마리, 육류용 수입 중국말이 557마리, 당나귀가 12마리 등이다.

지금도 5.16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견원악 제주말 방목지'에 순수혈통의 제주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다. 1986년 제주말이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개관한 이 목장에는 지금 380마리의 말들이 제주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 있다. 당초 121마리를 풀어놓은 것이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고려 문종 27년(1073)과 고종 45년(1258)에 각각 고려의 복속국이었던 탐라는 고려에 말을 공물로 바친 기록이 있어 소형 말인 과하마(果下馬: 과일나무 밑으로 기어다닌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가 사육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성신화에도 송아지 망아지의 얘기가 나와 일부 학자들은 선사시대부터 적은 수의 조랑말이 사육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 말이 유명하게 된 것은 원(元)나라가 고려 충렬왕 2년(1276) 원에서 말 160필을 들여다가 수산평(水山坪)에 풀어놓은 후부터다. 그러나 원은 망하고 여기서 사육하던 말들은 그대로 고려에 예속되었다. 그 후 고려가 망하자 이번에는 조선이 그것을 이어 받았다.

원나라가 말을 기를 때는 해안지대까지도 목장이었기 때문에 민가의 농작물이 손해를 보는 일이 잦았다.

공마수송기간 두달 말값 최고 쌀 20석

세종 11년(1429) 제주 사람 고득종(高得宗)이 이를 건의해서 목장을 산기슭으로 옮기고, 담을 쌓도록 해서 10개소의 목장으로 나눴다. 조선시대 제주지도를 보면 그 목
장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금 구좌읍 위의 1소장에서부터 제주를 한 바퀴 빙 둘러 표선면 위의 10소장까지이며, 그밖에 녹산장(鹿山場)과 상장(上場), 침장(針場)이 따로 있었다.

목장 관리의 총 책임은 목사에게 있었으며, 판관과 정의현감, 대정현감은 감목관 직책을 겸임하고 있었으니 당시 행정은 사람에 관한 것보다 말에 대한 것이 먼저였다.

말 진상은 해마다 바치는 200필과, 3년마다 바치는 식년(式年: 子.卯.午.酉年) 공마 700필이 있었으며, 국가의 교역상 필요에 따라 바치게 했는데, 그 수는 그때마다 달랐다.

그밖에 임금님의 3명일(三名日: 즉 正朝와 冬至, 誕日)에 각각 20필씩 진상하는 예가 있었으며, 또 삼읍(三邑) 수령이 바뀌어 갈 때 바치는 세 필이 또 있었다. 세 명일 때는 말뿐 아니라 검은 소도 20마리씩을 바쳤다.

말의 값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서울 도착 가격으로 상등 웅마는 쌀 20석, 중등 자.웅마와 상등 어린 말은 쌀 15석, 하등 웅마와 중등 자마는 쌀 10석이었다.

그러나 말은 첫째 수송이 문제였다. 공마(貢馬)의 수송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이뤄졌다.

필자는 여러 해 전 제주 말을 어떻게 서울까지 수송했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제주MBC 취재팀의 일원으로 해남지방을 조사한 바 있다. 그런데 그곳 바닷가에 한 아름씩은 한 제주 돌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더러는 그 지방 사람들이 화단 돌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취재팀의 결론은 제주 말을 수송하는데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싣고 온 돌을 목적지에 닿은 후 버렸다는 결론이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수송이 두 달 정도 소요되고, 필요한 양곡이 1천 석이나 됐다니 그 과정의 어려움을 물어 무엇할 것인가.

좋은 말만을 밖으로 내갔으므로 말의 퇴화도 큰 문제였다. 그 대책으로 사복시에서는 우량 종마에 대해 부자(父) 낙인을 찍어 내가지 못 하게 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제주말의 체구에 대해 우량종을 다 서울로 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죽은 말에 대한 목자들의 변상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였다. 이건(李健)이라는 나이 어린 왕족이 귀양지 제주에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고 자기 호를 따 <규창집(葵窓集) >이라고 했다.

이 책에 목자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목자들은 원래 가난하고 천한 백성들이 담당하는데, 해마다 (소와 말의)손실에 대한 변상을 하기 위해 농토를 팔고, 심지어는 처자를 팔아 변상하기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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