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표류기...파란 눈에 비친 100년전 한국의 모습

섬이란 본래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배에 의지하여 가고 오던 시절에는 바람과 파도의 영향으로 배도 사람도, 떠가고, 떠오기를 밥먹듯 했던 것이다.

조선조 영조 46년(1770년) 애월 사람 장한철(張漢喆)은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른다는 큰 뜻을 품고 일행 26명과 함께 제주항을 떠나 한양으로 가다가 육지를 바라보는 지점에서 폭풍우를 만나 서북풍에 밀려 망망대해를 헤매게 된다. 그는 마침내 유구열도(琉球列島) 중의 하나인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고, 여러 가지 봉변을 당하다가 결국은 8명만 살아 귀환한다.

"나는 뱃사람들을 거느리고 높은 데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푸른 물결 뿐이요, 멀고 넓어서 끝이 없다. ...이것이 혹시 유구의 지경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섬은 남북의 길이가 이십 리 남짓하나, 동서는 오리도 되지 못하겠다."

이것은 그 일행이 유구에 표착한 직후의 기록이다. 이 기록만으로도 그가 매우 침착한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같은 장한철의 <표해록>은 살아 돌아온 후 임금님의 명령에 따라 저술되는데, 후세 학자들로부터 "국문학 사상 보기 드문 해양문학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표해록 중에는 최부(崔溥)의 <표해록>도 있다. 최부는 성종 18년(1487) 9월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에서 근무 중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육지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조난했다. 그는 중국 강남(현재의 절강성)에 표착하여 그곳의 문물을 보고, 특히 그곳 농부들의 자새(水車) 제조법을 살피고 돌아와 표해록에 자세히 기록했다.

정조 18년(1794) 송경천(宋擎天) 역시 아들 둘과 함께 진상물을 수송하다가 태풍을 만나 소주부(蘇州府)에 표착했다. 그들 부자는 육로로 귀환하다가 아버지가 중도에 사망한다. 아들 의명(義明), 인명(仁明) 형제가 아버지의 시체를 업고 돌아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들을 충효자로 표창한 기록이 있다.

이같이 조선시대에 중국과 유구, 일본에 표류한 경우는 기록에 있는 것만도 40 차례 가까이 된다.

딴 나라 사람들이 제주로 떠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 일본과 유구국 사람이었다.

특기할 것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설 무렵 명의 유민들이 제주로 떠온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으로 보내주기를 원했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트집을 걱정하여 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광해군 3년(1611) 3월 유구국 왕자가 제주에 떠왔을 때 나쁜 관원들이 그들이 가진 귀한 물건을 욕심 내어 살해한 사건과 함께 부끄러운 기록이다. 이 때문에 장한철 일행은 유구에 표착했을 때 역경을 겪게 된다.

이들 나라 사람들이 제주로 떠온 경우도 20여 회에 이른다.

서양 사람들도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떠온 경우가 있었다. 인조 5년(1627) 9월 얀 얀세 웰테부리(Jan Janse Weltevree)가 제주에 상륙했다. 그들은 오우벨 켈크(Ouwer Kerck)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물을 구하기 위해 선원 2명과 함께 보트로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 사이 배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서울로 압송됐다. 웰테부리는 나중 한국 명 박연(朴淵)으로 고치고,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에 도움을 줬다.

그 후에 하멜(Hendrik Hamel)이 탄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태풍으로 대정현 해안에서 좌초했다. 일행 64명 중 36명만이 생존한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기를 원했으나 다음해 5월 조선 군인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됐다. 나중 이들은 여수좌수영, 순천, 남원 등지로 분산 수용됐다.

현종 7년(1666) 좌수영에 있던 하멜 일행 8명이 탈출하여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네델란드로 돌아가 억류됐던 기간의 기억을 <하멜 표류기: 蘭船 濟州島 難破記>라는 책으로 풀어썼다.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산방산 앞에 세워지고, 지난해에는 남제주군이 용머리 해안에 스페르웨르호 모형을 재현하여 놨다. 그러나 아직도 이 배의 정확한 표착지가 어디냐는 논의는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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