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 적소 터 표지
남문로터리에서 원정로로 내려가는 길가, 주택은행 제주지점 정문 앞에는 초라한 표지석 하나가 서있다. 한라일보가 몇 해 전부터 역사의 현장에 세우는 표지석의 하나로 ‘광해군(光海君)의 적소 터'라고 돼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민심 수습책으로 세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선조 39년(1606) 계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았으니 이때 이미 비극은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 말년 영창대군을 왕위 계승자로 추대하려는 일파가 있었다. 그런 중에 선조는 1608년 2월에 승하하고 만다.

어렵게 광해군이 즉위하고, 그를 지지하던 대북인(大北人)들이 세력을 얻는다. 그러나 대북인에 의한 흉계는 광해군으로 하여 실정에 빠뜨린다. 당파 싸움의 희생이 된 광해군은 그의 재위 15년(1623년) 3월 폐위되고, 서인(西人)들이 광해군의 조카인 종(倧)을 옹립해 인조(仁祖)의 시대를 열었다.

▲ 보우대사 순교비
이 판이 되자 인목대비는 영창의 원한을 풀려고 광해를 죽이라고 한다. 반정공신들이 모두 찬성했으나 오직 이원익(李元翼)의 상소로 목숨만은 부지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안치됐다가 트집을 잡혀 가족들을 다 죽여 먹고, 태안을 거쳐 제주로 옮겨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가 제주로 옮긴 것은 인조 15년(1637) 2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로 그의 시야는 행선지도 모르게 휘장으로 가리웠다. 마침내 배가 제주에 닿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 기구한 임금은 장탄식을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당시 제주 목사 신경호(申景虎)가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의 사람이 모두 적입니다"고 한 말은 당시의 정계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광해군은 처량한 심사를 시(詩)로나 읊다가 1641년 7월 67세의 나이로 가시 둘린 적소 안에서 죽는다.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제주 목사 일행에 의해 한양으로 반장(返葬)됐다.

그가 죽은 후 500년이 가까워지는 이제 그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 평화통일 불사리탑
보우(普雨) 선사의 호는 허응당(虛應堂)이다. 북제주군 조천리에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평화통일불사리탑'이 1998년에 준공되고, 이와 더불어 ‘허응당보우대사순교비(許應堂普雨大師殉敎碑)'도 크게 세워졌다.

이 비석의 뒷면에 일반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간판 하나를 세웠는데, 거기에 “보우 대사는 금강산 마하면 선방에서 15세에 삭발하고…, 조천 땅 연북정에 귀양, 제주 지사 변협의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고 적었다.

‘제주 지사'는 ‘제주 목사'를 현대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쳐도 ‘조천 땅 연북정에 귀양'은 아무래도 아전인수인 듯하다.

보우는 유교가 국교이던 조선시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 왕후의 신임을 받아 기울어 가는 불교를 중흥시키려 했다. 그는 자신이 있던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으로 삼고,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으로 해 2대 본산을 정하고, 스님들에게 승과(僧科)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승려에게 무한 공양하는 불교 의식'인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국고를 낭비하는 등 요승이라는 규탄의 소리가 높았다.

이런 와중에 명종 20년(1565) 4월 대비가 사망하니 사태는 돌변했다. 조정에서 일어나 극형에 처하도록 청했으나 명종은 그를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같은 해 10월 변협(邊協)이 제주 목사로 부임해 왔는데, 무슨 감정이 있었는지 그를 붙잡아 장살(杖殺)하고 만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조정에 알려져 변협 목사는 사임하기에 이른다.

기록에는 보우의 유배처가 애월읍 도내봉(道內峯)이었다고 하는데, 조계종 측의 주장과는 다른 장소다. 그가 사망하기 전 읊은 시가 전해오는데, 여기 번역된 한 구절을 적었다.

뭇 봉우리 비추는 달빛 한 밤중인데
밤이슬이 찬 하늘을 씻은 듯 맑은 은하수
갈바람 불지 마오. 나뭇잎 지니
수심과 불안 떨쳐버리니 마음이 평정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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