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산지골에서 주자대전·역학 강론
김정희 추사체 완성·국보 ‘세한도’ 남겨


▲ 낙숫물이 바위를 둘듯 학문에 정진하라는 교훈석
조선시대 제주에 귀양왔던 사람들은 대개 잘 배우고, 인격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절도(絶島)의 유배지에 와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이 고장의 자제들에게 자기가 배운 것들을 가르쳤다. 잘 배웠다는 것은 어디나 자기가 있는 장소에서 공헌하는 것이다.

현종 14년(1673년) 7월 신명규(申命圭)가 유배되어 왔다. 그는 집의(執義)로서 효종의 승하하자 능역(陵役)을 관장했는데, 남인들이 능석(陵石)에 하자가 생겼다고 그 책임을 물어 감조관(監造官)인 이정기(李鼎基)와 함께 유배를 보냈다.

신명규는 제주목을 거쳐 대정현 연래촌(延來村, 상·하예리) 이애길(李愛吉)의 집에서 7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며 지방 유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의 문하생 오정빈(吳廷賓)은 숙종 32년(1706년)에 사마시에 급제했다. 오정빈(1663년~1711년)은 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으로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과 교류하고, 전적과 승의랑(承議郞)을 거쳐 만경(萬頃) 현령으로 재직 중 관아에서 사망했다. 유고로 ‘조헌집(兆軒集)'을 남겼다.

 ▲ 우암 송시열의 비.
신명규는 진도로 옮겼다가 아들 신임의 해명으로 풀려났다. 한편 신임도 경종 2년(1722년) 5월 제주로 유배됐었다. 그는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사직(司直)으로 소론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밀렸다. 그는 당시 84세 고령으로 감산촌(柑山村, 감산리)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곧 불렀으나 상경 도중 해남의 객사에서 사망했다.

오현 중의 한 사람인 송시열(宋時烈)은 숙종 15년(1689년) 2월 제주에 유배됐다. 그는 유배되기 전해 10월에 숙종이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나중 景宗)를 세자로, 장씨도 희빈으로 책봉하려 했다.

송시열은 이때 상소하기를 “중궁 민비(閔妃)가 아직 젊은데 왕서자를 원자(元子)로 정호함은 시기상조이며, 세자 책봉은 불가하다"고 추상같이 소리쳤다. 이때 숙종은 불과 29세이며 민비는 23세여서 출생이 가능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숙종은 무례한 말로 세자 책봉에 간섭한다 하여 동조한 서인들을 파직하고, 송시열은 제주로 귀양을 보냈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의 원로였다. 그는 산지골 윤계득(尹繼得)의 집에 머물면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어류(語類), 역학(易學) 등을 현지의 선비들에게 강론했다. 그는 또 귤림서원에도 축문을 지어 보냈다. 당시 제주 유림들이 거유(巨儒)를 만나 성리학에 눈뜨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남인들이 그를 국문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서울로 압송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지금 그가 배향돼 있는 오현단 절벽에는 “증자와 주자가 벽처럼 서있다"는 뜻의 증주벽립(曾朱壁立), 그의 글씨 네 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김진구(金鎭龜)와 김춘택 부자도 제주에 유배돼 와서 이 고장 선비들을 가르쳤다. 김진구는 기사사화(己巳士禍)에 연루되어 제주로 와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 정창선(鄭敞選) 고만첨(高萬瞻), 오정빈 등이 숙종 33년 정월 문과에 급제했다.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은 장희빈이 사사된 후 그녀의 동생 희재의 처와 공모해 세자를 시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숙종 27년(1701년) 제주로 유배됐다. 그는 과거 부친이 귀양살이하던 집에 머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난 그는 아버지의 문하생들과 교류하면서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문집 북헌집(北軒集)은 산지천 가 배소에서 읊은 시들인데, 제주 유배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출렁거리는 남쪽 아득한 바다가 무릇 몇 만리일꼬/ 성은이 하도 커서 남쪽 아득한 바다가 작은 듯하구나"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는 한 구절이다.

김정희(金正喜)는 헌종 6년(1840년) 9월 대정에 유배되었다.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된 것이었다. 그는 그해 10월 초 대정의 배소에 도착해 이후 9년 동안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한편 곽지리 박계첨(朴癸瞻), 제주의 김구오(金九五), 대정의 강도혼(姜道渾) 등은 그의 서법을 익힌 수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은 아깝게도 생애가 길지 못했다. 이들 외에도 이익(李 ), 임징하(任徵夏), 권진응(權震應) 등 더러 훈학을 한 유배객들이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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