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투영,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것이 연극이라는 장르다. 인생을 객관적으로 살피게 만듦으로써 성찰의 기회를 준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전통 연극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특별하게 성찰할 여지가 없으며 흔히 말하는 작품성이라는 것도 부족하다. 그러나 삶의 유희를 다루는 것도 연극의 한 기능이라고 볼 때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일정부분 제 몫을 한다.

마광수 교수(연세대 국문학)의 동명 에세이집을 연극으로 옮긴 작품이다. 마 교수의 이 책은 특히 성 관련 담론을 통해 사회의 경직된 엄숙주의의 양면성 등을 비판, 주목받았다. 섹스 잔혹 판타지를 표방한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이런 마 교수의 성적 담론을 전한다. 역시 마 교수의 소설인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 ‘사라’와 젊은 ‘마 교수’의 인연을 다룬다. 정신보다는 육체, 과거보다는 미래, 집단보다는 개인, 질서보다는 자유, 도덕보다는 본능을 추구하는 사라와 마 교수 간의 열정적 사랑을 그린다. 주제와 내용이 이러한 만큼 극은 철저하게 유희, 즉 오락적인 면에 치중돼 있다.

사라를 연기하는 ‘플레이보이’ 모델 이파니를 비롯해 2002년 SBS 슈퍼모델선발대회 출신인 조수정, KBS 2TV 드라마 ‘아이리스’(2009)에 출연한 이채은, 신예 민수진 등은 각자 육체적 매력을 뽐내며 관객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짐승남인 ‘지승남’을 연기하는 연극배우 김은식도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며 이런 경향을 풀무질한다.

극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인용한 중세 철학자 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주제를 전한다. 연극배우 유성현이 연기하는 젊은 마 교수의 입을 통해 “보기에 즐거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Pulcra sunt quae visa placent)”라고 외친다. 박안나를 연기하는 조수정의 상반신이 드러나는 장면 등 여성들의 육체가 오롯하게 전시되는 것을 빗댄 표현이다. 미학적 깊이가 녹아 있는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 것이기는 하나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다. 오프닝과 클로징에 곁들여지는 패션디자이너 한동우의 로맨틱하면서도 섹시한 패션쇼도 오락 측면을 강화한다. 극중 이파니가 섹시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한 요소다.

그렇다고 극이 무조건 오락성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아니다. 종반, 원작자인 마 교수에게 헌정하는 듯한 약 15분 동안의 무대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마 교수와 사라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는 이 장면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 발표한 희곡 ‘피그말리온’을 연상케 한다. 특히,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이후 작품들에서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하고 지나치게 쾌락주의를 강조했다는 비판을 받은 마 교수의 과거가 묻어나 깊은 인상을 안긴다. 심지어 마 교수는 ‘즐거운 사라’(1991)가 외설소설이라는 이유로 2개월간 구속됐고, 교수에서 해직되기도 했다. 영어와 비유로 에둘러 표현하던 시대의 관행을 깨고 과감한 성적 묘사와 판타지를 표현해 논란의 중심에 섰던 마 교수의 모습이 이 장면에 사이코 드라마 형식으로 담겨있다.

극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파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연기 신고식을 치른 이파니는 무대에 잘 어울린다. 주로 춤과 노래만 선보이는 이파니는 극 중반까지는 그냥 예쁜 인형 같다. 그러나 막바지에서 감정을 고조시킬 때는 예상 외의 폭발력을 드러낸다. 섹시한 이미지로 인해 주인공으로 뽑혔다는 자타공인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만한 연기다.

객석에는 뜻 밖에도 젊은 여성들이 많다. 호기심 많은 남성들로만 가득할 것 같은 이 연극에서 객석의 반 이상을 차지한 20, 30대 여성들은 많이 웃고 자주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친구와 같이 온 대학생 김모(24)씨는 “생각보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며 “여대생들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공감되는 장면도 많더라”고 전했다.

극은 대학교 축제 기간이 배경이다. 관객들이 마치 축제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면도 꽤 있다. 일부러 어려운 메시지를 구하려 하지 말고, 그렇게 축제현장에 와 있는 듯 관람하면 꽤 즐길만한 연극이다.

마 교수는 강철웅 연출에게 “그 동안 너무 많은 악평과 괴로움에 시달렸다”며 “다행히 이번 연극을 통해 내 이미지를 다시 살려줘 감사하다”고 전했다고 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6월30일까지 서울 대학로 한성아트홀 1관에서 볼 수 있다. 극단 사라와 한성아트홀이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만19세 이상 관람가. 02-741-0104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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