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는 작은 결혼식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힘 있는 사람들의 과시장이 돼버린 결혼식과 피로연을 대거 축소하거나 비공개리에 한다고 한다.
 
모두가 이 부조리를 잘 알면서도 필요악처럼 한국 사회의 고질적 습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일본에서는 이렇게 사회적 문제로 부각될만큼 화려하게 하지 않는다.
 
일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어떠한가. 아니 동포들만이 아니고 일본인들도 거의 비슷한 결혼식 풍경이다. 

상징적 과시욕의 대명사처럼 클로즈업된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결혼식 자체부터가 보편적이다.
 
다만 결혼식에 있어서 신사에서 식을 할 때만은 그 의식에 따라 하니까 현저한 차이가 있지만 교회에서의 의식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의식은 당사자 가족과 가까운 친족, 친구들만 참석하고 일반 하객들은 피로연에만 참가한다.
 
이곳에서도 예전과 달라서 초대 손님이 아주 줄어 들었다. 일본판 작은 결혼식이다.
 
가족, 친족, 지극히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서 피로연을 갖는 예가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거품 경제의 후유증 속의 경제 침제와 대지진으로 인한 일본 사회의 구조적 변화이다.
 
가족과의 친밀한 공유 의식을 더욱 돈독히 하고, 형식적 세레머니 즉 모두 불러서 크게 치르던 결혼 피로연이나 장례식 등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결혼 피로연인 경우 일반적으로 호텔을 사용하지만 초대 손님은 많을 경우 2백여명이지만 요즘은 백여명으로 축소하고 있다.
 
피로연은 휴일날을 택하고 시간은 정오부터 시작해서 약 두시간 반 정도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사회자나 주례 역할을 하는 사람이 간단히 결혼식 보고를 하고 양가를 대표해서 각각 한 두 사람의 축사가 있고, 신랑 신부의 케키 컷트 , 그리고  건배 제창 후 식사로 들어간다.
 
손님들이 앉을 자리도 미리 다 정해져 있다. 초대 손님들의 참가 여부를 청첩장과 함께 왕복엽서를 동봉해서 확인 후 주최자가 정한다.
 
가끔 이 자리 배치가 당사자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8명에서 10명이 앉는 테이블에 어떻게 정할지 종합적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신랑, 신부 부모들과 그 가족이 가장 앞 자리에 앉지만 일본에서는 가장 뒷 자리에 앉는다.
 
오늘의 주인공은 양가이니까 그들을 정중히 모셔야 한다는 한국인의 인식과, 오신 손님을 더욱 정중히 모셔야 한다는 일본인의 인식의 차이가 앞 자리인가 뒷 자리인가를 결정한다.
 
흑백 논리 속에 어느 것이 좋다는 의견과 논쟁은 의미 없는 소모전에 불과하다.
 
이것이 서로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이다. 어떤 뛰어난 문화에도 장단점을 갖고 있다.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지키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약 두 시간 반의 연회 사이에 신랑 신부가 두번쯤 옷을 갈아 입는다.
 
"이로나오시" <いろなおし:色直し>라고 하는데 웨딩드레스에서 파티용 드레스, 다음은 민족의상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연출이다.
 
옷을 갈아 입고 재입장하면서 장내의 불을 모두 끄고 캔들 서비스가 있다.
 
각 테이블에 있는 양초에다 신랑 신부가 인사겸 돌면서 불을 붙이고 나서 정면에 있는 자기 자리에 와서 앉는다.
 
그 사이 프로를 불러서 춤과 노래가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카라오케를 준비해서 손님들 스스로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연출은 신부가 자기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 낭독이다.
 
오늘 이렇게 신부가 되어 결혼식을 맞게 해준 감사의 편지인데 대부분이 눈물을 자아낸다.  
 
그리고 나서 신부는 신랑 어머니에게 신랑은 신부 어머니에게 꽃다발 증정이 있다. 
 
끝으로 양가를 대표해서 신랑 아버지가 감사 인사를 마친 후,  출구에 신랑  신부와 양친들이 나란히 서서 손님들을 배웅한다.
        
이것으로 결혼 피로연은 끝나지만 손님들의 축의금은 혼자 참가할 경우에는 일화 3만엔에서 5만엔,  부부일 경우에는 5만엔이 일반적이다.
 
그 이상의 축의금은 서로의 독특한 관계에 따라 다르다. 이것이 일반적 결혼 풍경이다.  
 
여기까지 써서 이 기사를 마칠려고 했지만 이 글을 쓰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필자는 딸, 아들 각각 하나인데 큰 딸이 7월 28일 오사카 중국요리집에서 결혼 피로연을 갖었다.
 
결혼식은 5월 31일 날 하와이에서 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사위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부모들도 그곳에 살고 있다.
 
미국과 일본 본토 가운데 하와이가 있으니까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에서 가족들만 모여서 식을 올렸다.
 
이것으로 마칠려고 했는데 고향 제주도에 계신 백세이신 어머니와 오사카의 여러 선배들이 피로연을 오사카에서 해야 한다는 권유 때문에 했다.
 
중국요리집과 호텔은 격이 다르다. 요리는 오히려 중국요리집이 나을런지 모르지만 장소 값이 다르다.
 
중국요리집은 축의금 1만엔도 가능하지만 호텔은 어림도 없다. 실례이다.
 
그래서 필자는 약 90명의 초대 손님을 모시고 중국요리집에서 했다. 오는 손님들  중에는 1만엔도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다.
 
필자는 식을 하와이에서 했으니까 케키 컷트, 옷 갈아 입기, 어머니께 편지읽기, 꽃다발 증정 등 모든 것을 생략했다.

처음부터 치마저고리와 바지저고리 민족의 상으로 일관했다.
 
중국요리집이라고 해서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대가 있는 연회장은 물론 대기실 등 각종 연회를 핳 수 있도록 갖춘 곳이다.
 
이 날 깜짝 놀란 것은 필자가 감사의 인사를 드릴 때 "고향의 봄"의 우리 동요가 은은히 들려왔다.
 
일상적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필자의 딸이 어릴 때 아버지가 가르쳐 준 노래라고 연회장 홀의 담당자한테 그 테프를 갖고 가서 부탁했다고 한다.
 
인사를 나누면서 손님들이 돌아갈 때까지 계속 들린 "고향의 봄"에 손님들도 가슴 뭉클했다고 한다. 물론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끝난 피로연이지만 8월에는 시카고의 신랑 부모가 그곳에서 피로연을 갖는다고 한다.
 
이번에 신랑 부모들이 오사카 피로연에 안 왔으며 필자도 시카고에 가지 않는다. 
 
이것은 하와이에서 서로 사전에 협의해서 결정한 사항이었다.
 
이러한 필자 가정의 결혼식과 피로연을 마치면서 동포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아울러 필자의 경험담을 솔직히 쓰고 있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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