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

‘나는 70년 동안 살아오면서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새로운 길을 늘 외롭게 걸어왔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공연 메카인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의 자기 고백이다.

제주출신인 고 사장은 지난 2013년 3년 임기의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임명받았다. 그 후 고급문화를 대중화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해내는 열정으로 다시 연임했다. 지금까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연임된 경우는 고 사장이 처음이다.

고 사장은 ‘고급문화의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예술의전당 이미지를 과감하게 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상화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내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공들인 부분이 좋은 공연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이다. 오페라를 예로 들자면, 국가에서 10억의 예산을 들여 만들어진 공연은 길어야 3일 정도 무대에 선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5천 명 정도가 관람을 한다. 아까웠다. 막대한 자본을 들이고, 내로라하는 연주자와 가수가 만든 무대의 가치를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최고의 음향, 최고의 영상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공연을 전국 규모의 문화 단체에 배포했다. 1억 정도의 예산을 들여 10배가 넘는 관객이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반발도 컸다. “기존 오페라의 관점에선 어이없는 일이었으니까. 비싼 가격에 표를 구매했는데 누군가는 같은 공연을 무료로 본다고 하면 속상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오페라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6개월 정도 로비에서 관찰해봤더니 특히 오페라의 경우 관람객이 고정적이더라. 좀 지나면 얼굴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야 발전이 되겠는가. 일단 많은 사람이 ‘오페라’라는 장르를 접해봐야 한다. 그렇게 영상으로 오페라를 보면 ‘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구나. 실제로 보면 어떨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거리가 멀어서, 혹은 이질감이 있다는 이유로 막연하게 생각했던 잠재적인 관람객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관람객이 양적으로 많아져야 질 좋은 공연이 만들어지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제주출신 고학찬 사장의 ‘뚝심인생 70년’

1947년 제주시 용담동에서 태어난 고 사장은 제주서교(현 제주서초등학교)와 제주일중을 졸업하고 제주일고(9회)에 입학해 1학년을 다니다가 서울 대광고로 전학해 졸업한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고학찬 사장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는 그가 늘 꿈꿔왔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동경이었다. 그래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된다. 영화감독에 대한 꿈 때문이다.

당시 제주에서 올라온 친한 친구 8명은 대부분 상대와 공대를 다녔고 후에 교수직 등 안정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고 사장은 대학생활부터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1966년 대학 초년생 시절 그는 제주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유진 오닐이 쓴 ‘긴 귀향 항로’라는 희곡을 가지고 친구들에게 직접 연기지도까지 해가면서 제주극장(제주시 삼도동 위치, 나중 현대극장으로 개명) 무대에서 연극 공연을 가진 것이다. 이 공연에는 제주출신 학자인 좌승희(전 KDI 선임연구원), 현상훈(연세대 교수)을 비롯한 여학생 4명도 함께했다.

1966년 제주극장에서 연극 '유진 오닐의 긴 귀향 항로'의 공연을 끝마치고 출연한 친구들과 기념촬영

대학을 졸업한 고학찬은 TBC공채 PD로 들어가면서 제주출신 중앙방송 PD 1호가 됐다. 그는 라디오 PD로 시작하면서부터 명성을 날렸다. 당시 ‘손오공’이라는 제목의 우리나라 최초의 싸이언스 픽션 드라마,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뮤지컬 ‘유쾌한 셀러리맨’은 당시 청취율 1위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라디오와 TV PD를 거치면서 이런 인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그만이 갖고 있는 새로운 노력과 시도였다.

그 후 그는 미국 뉴욕에서 교포들을 위한 우리말 방송도 만들었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 케이블방송에도 관여했다.

그리고 서울예술대학, 추계예술대학교, 세명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윤당아츠홀 관장을 지내며 다양한 예술의 폭을 넓혀왔다. 물론 가는 곳마다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고학찬 사장의 트레드마크이기도 하다.

고학찬 사장은 고향 제주를 늘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사진(좌측 고학찬 사장, 우측 영화배우 노주현)

그는 같은 방송 아나운서 출신의 여자와 결혼을 하고 세명의 딸을 두고 있다. 세 딸들은 아직도 아버지가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길을 걸어왔다는 걸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학창 시절 그의 별명은 ‘롤링스톤’이었다. 고향의 짱돌처럼 계속 굴러 다니면서 새로운 것도 많이 만들고 또한 자신도 많이 유연해졌으며 다양한 세상도 원없이 만났다고 한다.

당시 제주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치열하게 살면서도 고향 제주는 항상 자신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줬다고 한다. 찬란한 실패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것, 어떤 도전도 의미 없는 일은 없다는 것, 그런 메시지를 늘 던져준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술은 인간에게 하모니를 가르쳐준다. 모두들 제 할 말만 하고 사는 시대다.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같이 합창 한 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합창이라는 것이, 옆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 소리를 내는 것 아닌가. 서로 다른 음(音을) 내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합창의 묘미다. 입만 벙긋거리면 음에 빈 자리가 생기고, 욕심을 부리면 나만 튀게 된다. 그렇게 조율의 과정을 학습하는 거다.

성당이나 교회의 천장에서 스탠드글라스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낱장을 떼어 보면 의미 없는 조각이지만, 모여 있으면 “와-” 탄성이 나오는 걸작이 되지 않는가. 나는 그게 미술에서의 하모니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개인이 모여 멋진 우리가 되는 것. 예술은 그런 세상을 가능하게끔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제주출신이며 방송PD 출신인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

그는 오늘도 예술이 일반 대중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대중을 위해 무료 음악극과 아동극을 꾸준히 올릴 예정이고, 기업과의 연계를 통해 사회공헌 공연 기획도 늘리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 햇살 콘서트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겠다고 한다.

‘예술에는 귀천이 없다’고 늘 얘기하는 제주출신 고 사장의 앞으로의 예술적 도전이 궁금하다.

‘Hoc quoque transibit.’ 그의 집무실에는 걸려있는 라틴어 글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고 사장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영문서예다. 멈추고 싶은 영광의 시간도 언제까지나 머무르지는 않는 법. 부단한 발전과 기발한 발상만이 현재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예술의 가치가 우리의 삶에 보다 오래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주출신 고학찬 사장은 오늘도 식지않는 열정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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