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양재 (李亮載) / 20세 때부터 고서화를 수집한 민족주의 경향의 ‘애서운동가’로서, 서지학과 회화사 분야에서 100여 편의 논문과 저서 2책, 공저 1책, 편저 1책 있음. 현재 ‘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제주의 동쪽 끝은 성산읍 ‘일출봉(日出峯)’이고, 서쪽 끝은 한경면 ‘수월봉(水月峰)’이다. 이 두 곳은 모두 수성화산활동(水性火山活動)에 의해 형성된 대표적인 화산(응회환)이다. 이 가운데 ‘일출봉’은 2000년 7월 18일 천연기념물 제420호로 지정되었고, ‘수월봉’은 2009년 12월 11일 천연기념물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수월봉’은 제주의 가장 서쪽 끝머리에 있는 한경면 고산리의 넓은 들판 끝 해안가에 솟아있는 77미터가 조금 넘는 작은 봉우리이다. ‘수월봉’에서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섬인 차귀도가 내려다보인다. 더욱이 ‘수월봉’ 정상의 ‘수월정’에 앉아서 바라보는 낙조는 제주 어느 곳에서 보는 것보다 아름답다. 즉, 제주도에서는 ‘일출봉’에서 일출을 보고, 한 날 저녁에 이곳 ‘수월봉’에서 일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돌려 생각한다면 12월 31일 ‘수월봉’ 일몰을 보고, 1월 1일 ‘일출봉’ 일출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는 제주로 이주해 온 이후 한때 풍수적(風水的) 개념의 혼돈이 일었다. 필자의 조부는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이름 있는 지관(地官)이셨다. 원래 우리 가문에는 풍수에 얽힌 여러 조상들의 전설적인 여러 일화가 전해져 내려왔다. 그래서인지 필자도 산천의 기를 체질적으로 감성적(感性的)으로 잘 느끼곤 한다.

1991년 9월 30일에 필자가 의성 허준 선생의 잃어버린 묘소(경기도기념물 제128호)를 찾아내는 데는 그러한 선천적인 민감한 감각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제주의 한라산 역시 우리 ‘백두대간’에 속한다. 제주의 한라산 정상에서 느끼는 기(氣)는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는 기(氣)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의 풍수를 하나의 독립 공간으로 생각해 보면, 제주의 자연에서는 또 다른 감성을 느낄 수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수월봉’ 인근의 ‘당산봉(堂山峰)’은 제주도 서부에서는 매우 영적인 공간이다. 옛 사람들이 이 오름을 ‘당산봉’, 또는 ‘당오름’이라고 한데는, 이 산에 당(堂, 당집)이 탐라국 시대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당오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새둥지(巢)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앞의 ‘차귀도’는 어미 새의 모습을, ‘와도’는 어린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여기 한경면 고산리는 10,000~6,000년전 선사시대(신석기시대) 유적이 있어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필자는 제주의 많은 지명 가운데 한자 지명은 탐라가 신라로 복속한 이후에 부쳐지기 시작하였고, 탐라국 시대의 제주의 원 지명들은 대체적으로 한자 지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본다. 한경면 고산리의 ‘수월봉’은 불교가 제주에 들어온 고려초⦁중기에 부쳐진 이름으로 보인다. ‘수월봉’의 수월(水月)은 불교 영향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수월봉’의 서쪽 절벽은 마치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관음 뒤에 그려진 동굴이 있을 법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그런 느낌 때문에 옛 제주인들도 여기를 ‘수월봉’이라 명명한 것은 아닐까?

신라의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와 고려에 성행하였던 화엄종의 개조(開祖)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양양의 ‘낙산사’는 관음보살을 주불(主佛)로하고 있다. 원래 ‘낙산’이란 말은 불교의 ‘보타낙가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의상대사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는 관음신앙이 상당히 성행하였다. 제주에도 조천읍 조천리에 고려 중기에 창건된 ‘관음사’가 조선 중기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고려의 관음사와는 관련이 없지만 현재에도 제주시 아라동에 ‘관음사’와 연동과 도두동에 각각 ‘관음정사’가 있다. 또한 현존하는 고려불화 160여점 가운데 관음을 그린 ‘수월관음도’는 무려 45~6여점에 이른다.

불교에서 ‘수월(水月)’이란 “맑은 물이 있으면 달은 언제나 나타난다는 평등한 법성(法性)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물에 비친 달은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한다. 만인 평등과 공 사상은 불가 사상의 기저에 흐르는 바탕 사상으로서, 이는 도가의 무(無) 사상과도 상통한다. 필자는 한경면 고산리의 선사유적(신석기시대)과 당산, 그리고 수월봉 일대를 제주의 정신적 고향으로 잘 보존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특정 종교적 차원에서의 건의가 아니라 향토의 문화적 차원에서 제언하는 것이다.

우선, 당오름은 음택지(陰宅地)나 양택지(陽宅地)로서의 길지(吉地)는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 매장되어 있는 묘지는 이전하여야 하며, 인근에서의 건축행위를 일체 중지시키고, 가급적이면 ‘당오름’에 인접한 건축물들도 조만간에 없애는 것이 좋겠다. 이후에 수월봉의 중턱에는 ‘수월관음’을 주제로 한 작은 규모의 ‘수월관음전’ 정도가 하나 들어섰으면 한다.

현재의 제주에 유행하는 사찰의 대형화는 제주불교의 외화내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이 아닌, 그저 20평 규모의, 불교도들을 위한, 승려가 필요 없는, 초교파적인 평민들의 명상처(瞑想處)로서 ‘수월관음도’를 주불로 하는 민중들의 ‘수월관음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수월(水月)’의 참 의미), 평등과 공(空)을 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월봉’과 ‘당산봉’, 그리고 ‘차귀도’와 고산리 선사시대 유적지는 현대의 우리에게 물려준 ‘과거의 유산’이지만, 이는 또한 현대의 우리가 미래에 물려줄 ‘미래의 유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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