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길현 교수/제주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고 제주담론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물밑에서는 한창이리라. 10일이나 되는 추석 연휴에 100만명이 해외여행 나간다고, 설마 정치권도 모든 걸 놓아버리지는 않겠지. 가족 만나러 오가는 귀향과 귀경 행렬 속에서도 슬프고 억울한 사연이 적지 않을 것이라 보기에, 국민들의 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한가위의 풍성함을 외치는 만큼이나, 삶에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선물 하나 기대하면 안 될까.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

일요 신자에 불과한 필자가 어쩐 일인지, 지난주 마태오 복음 20장 1-16절 얘기는 1주일이 지나는 데도 뇌리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선한 포도밭 주인이 일용직 일꾼에게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하루 일당으로 똑같이 로마 은화 1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데 대한 입장 차이의 얘기이다. 여기서 1 데나리온이 얼마인지 궁금하다면, 당시 1 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의 품삯이라는 주목할 때, 2017년 최저시급 6,470원 x 8시간= 51,760원과 2018년 최저시급 7,530원 x 8시간= 60,240원 쯤 된다고 추측해 보면 어떨까.

미사 참례 중에 분심이 든 것은, ‘하늘의 정의와 땅의 정의는 다르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땅의 정의는 대체로 차등을 인정한다. 현대 정의론의 대가라 불리우는 롤즈(J. Rawls)마저도 기본적으로는 평등주의자이면서도 예외적으로 차등을 인정한다. 그가 주창하는 차등의 원리에서는, 운 좋은 사람이 더 큰 이익을 취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불운한 사람의 처지가 더 향상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정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분히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 차원에서 현실의 차등을 정당화한 대표적인 이 세상의 정의론이다.

여기서 롤즈의 정의론을 비판하거나 용인하는 어떤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운 좋은 사람이 불운한 사람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기에, 내용적으로는 현실 타협인 롤즈의 차등의 원리도 현실에서 실천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떻든 다시 마태오 복음으로 돌아가 보면, 보통은 8시간 일한 사람에게 1시간 일한 사람보다 더 품삯을 준다고 해서 크게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8시간을 일하나 1시간을 일하나 똑같이 대우하면 불만이 생긴다. 포도밭 주인처럼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똑같이 대우하면 누가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일하겠느냐면서 비판하고 투덜댈 가능성이 더 많다. 아마도 기본소득론에 대한 일차적 이의 제기가 바로 바로 이것이다.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한 불만은 결코 시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의 제기이다. 왜냐하면 무차별 대우에 대한 일반적 불평은 ‘상응한 댓가’의 논리에 따른 땅의 정의라는 시각에서 볼 때 ‘불공평하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밭 주인이 선하고 후한 분이라는 것은, 8시간 일한 일꾼이나 1시간 일한 일꾼 누구에게나 똑같이 1 데나리온 씩 일당을 주는 걸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에게 각기 일한 만큼에 상응하여 차별적으로 기본급을 지급한 연후에 보너스를 얹혀주거나 품삯을 최저시급 이상으로 계산해서 더 많이 하루 일당을 지급해 줄 것이다. 이렇게 지상에서는 선하고 후하다는 것과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은 다르다. 선하고 후하다는 건 오히려 추가이고 덤을 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선한 포도밭 주인 비유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하늘의 정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품삯을 줄 때 노동시간이나 노동의 양에 따라 그에 합당하게 계산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급은 주어야 한다는 박애의 것이리라. 기여라든가 능력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기본급이 주어져야 한다는 무차별 복지의 논리일 것이다.

우리는 땅의 정의와 하늘의 정의가 병존하면서 때로는 대립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하늘의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크리스챤이 적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결과적 차별’을 수용하는 땅의 정의에서 벗어나 ‘결과적 무차별’을 지향하는 하늘의 정의가 통하는 나라를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물론 무조건적 무차별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현실의 이 세상에서는 100프로 무차별이 가능하지도 않을 터이다. 그건 하늘 나라에서나 존재하는 이상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의 삶 어느 영역에서라도 하나씩 무차별이 자리하도록 차근차근 무언가를 시도해 보는 데서, 인류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또 태평천국이 가능한 것은 아닐른지.

종교적으로 볼 때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똑같다는 것이야말로 무차별의 대표적 사례이다. 법적 영역에서는 누구든 법을 어기면 예외 없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서 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강조되는 적폐청산이라는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법 앞에서는 누구든 예외 없이 잘못에 대해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법적 정의의 구현에 다름 아니다. 1987년 이후 대통령을 뽑을 때 누구나 똑같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것도 전형적인 무차별에 해당한다. 21세기에 이르러 경제적 영역에서 무차별의 가능성을 하나 추가하면 어떤가 하는 제언이자 주장의 하나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소요되는 최소 비용을 매달 똑같이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선한 포도밭 주인 얘기에서 보듯이, 일찍 나와 일한 사람들은 기본소득 주장에 불만을 제기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써 일하며 살고 있는데, 이런 나에게서 세금을 걷어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겠다고 하니, 펄쩍 뛸 수밖에. 이렇게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각자 무엇인가 손해가 있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기왕에 익숙한 땅의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손해가 가지 않으면서 불운한 사람을 위해 복지를 늘려나가려면,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정부가 직접 돈을 벌어 이를 복지에 쓰는 것이다. 현대복지국가가 바로 이를 지향한다. 둘째는, 정부가 씀씀이를 줄여 이를 복지에 쓰는 것이다. 이르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정부 감시가 제대로 잘 작동해야 한다. 셋째는, 박애의 정신을 함양하여 일상에서 십시일반 기부 동참을 늘려가는 것이다. 종교와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기업 모두의 인식 전환이 크게 요청된다.

위의 세 가지 경우라면, 혹 어느 정부가 선한 포도밭 주인처럼 한다고 하여, 그 정부에 대해 비판하고 시위를 벌이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내년 개헌 때 대한민국‘국민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소득의 권리를 갖는다’는 구절을 하나 더 넣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에 대한 성남시 살메에서 보듯이 그 구체적인 해법은 각 지방정부에게 혜택과 자율성을 주어 찾아보도록 하고. 그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도 국제자유도시를 위한 특별자치도가 아니라 ‘복지모범도시를 위한 특별자치도’로 방향을 틀어 기본소득을 먼저 시범해 보는 새출발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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