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해심/ 이해산업 대표, 프로듀서, 제주 벤처창업리그 대상 수상, 제주 해양 올레 촬영 감독, 제주대학교 헤리티지 아카데미 제작PD 단편 독립 영화 '해녀콩' 제작/감독

우리는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해녀이야기를 알게 된다. 물질, 상군, 숨비소리, 테왁 등등.. 어느새 익숙한 단어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특히나 도시인들에겐 공감이 쉽지 않다.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 해녀!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힘든 노고의 삶! 우리도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외국인들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최근 유네스코 등재를 통해 제주해녀는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받았다.

제주의 독특한 문화유산이지만 사라져가고 있는 해녀의 존재와 문화! 이대로 잊혀지게 놔두어도 될까? 거창한 애국심이 아니다. 대내-외적인 인지와 지지를 기반으로 편해지려는 이기적인 애국심일수도 있다.

그러나 인정을 받는 순간 진정성이 된다. 단순히 등재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된다. 세계가 관심 갖고 보존하려고 애를 써준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절실하게 가치를 찾는다.

행원리로 향했다. 문화제 해녀1호 김영자씨가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깊게 패인 주름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준다.

그녀는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남매의 막내딸로 배고픈 시절을 보내었다. ‘보리고구리 줏언 밥해 먹으멍 살안.’ 6세에 4.3이 터지고, ‘집도 다 불 부쳐 버리난 어두운 굴속에 숨엉 배고픈허낭 어멍이 볼끈하믄 밥주겐핸 (밝으면 밥준다고).’

18세에 물질을 시작해, 21세의 나이에 얼굴한번 못 본 동갑내기와 혼례를 치뤘다.

‘부모말은 어그리지 못해난 경햅주게.’ ‘그땐 손도 빠끔빠끔 곱덴핸 해신데 이젱 가죽만 막 늘어낭.’ 그리고 그녀는 출가물질을 떠났다. ‘혼자망 벌엉 살수가 이서?’

7년간 발동기(배)를 타고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로 출가물질을 다니며 국제시장, 자갈치에 내다 판돈으로 수우마 두필을 샀드랬다. 심부름 값으로 한마를 더 받아 총 세필로 시작해 새끼를 쳐서 내다 판돈으로 땅을 조금씩 사들여 재산을 늘려가는 재미에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더랬다.

‘그만 두고 시픈 생각은 어서서.’ ‘가믄 돈이니까! 괴로워도 해뜨기 전에 물에 들어강 미역해영 빨리말령 팔젠허넨 손굽, 발굽이 다 빠져낭.’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몸이 동네 꽃이라~ 벌거넨’

출가와 남편의 해군입대로 생이별을 한 새색시는 미역, 우묵가사리, 전복, 고동을 따러 전국을 떠돌았다. ‘손도 굼브렁 터지고 설움도 나고 고향 생각도 나고 많이 울었지게.’ 12부락에서 떠난 원정대는 행원 포구에서 출발해 부산을 거점으로 기차, 버스 등 육상교통을 이용해 떠돌며 여럿이서 합숙을 해가며 고생했드랬다.

행원포구는 당시에 일본 화물선이 들어와 제주 전역에서 해녀들이 모이는 일등포구였다. 7년 만에 재회를 하여 큰딸을 시작으로 7남매를 낳았으나, 당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파상풍으로 한명을 잃고 6남매를 키웠다. ‘돈이 어서난 공부도 못하게 했주게. 슈퍼, 장사, 떡집.. 닥치는 데로 안해본게 업주게.’

행원 해녀는 유명하다. 땅이 없고 돌밖에 없는 척박한 곳.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곳. 행원 해녀가 다녀간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여 독하단 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일나가당 거미줄 키면 안심허영.’

(거미는 밤사이 열심히 집을 짓는다. 아침에 제일 먼저 지나가는 사람이 얼굴에 거미줄이 걸리는 것으로 남보다 늦을까 조바심을 내며 부지런을 떨었다.)

죽는 사람도 있었다. 바위에 다리가 끼여. 감태에 다리가 감겨. 숨이 다되어 올라가다 보인 전복을 보고 욕심을 내어, 그리도 악착같이 살았다. 그리 힘든데도 물질을 하며 노래를 하던 그녀. ‘한이 맺현 끝도 어시 나완.’

원래 해녀 노래는 뱃 물질을 거의 하지 않는 제주 해녀의 것이 아니었다. 육지에서 뱃 물질을 나갈 때 노를 저으며 부른 노동요였다. 흘러 흘러 전해진 제주해녀의 노래는 사라져가는 문화 중의 하나다.

79세의 나이. 이제는 방송인이 다되었다. 끊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기억하기도 힘들다. 건강상 더 이상 물질은 할 수 없지만 해녀노래를 전수 하는 그녀. ‘바당에서 태어낭 바당에서 자랐신디 바당 떠난 어떵 살젠?’

큰아들 한경훈씨는 해녀전수관을 포함한 기념관, 펜션, 카페...등의 종합문화센타를 계획 중에 있다. 어머니의 60년 물질 인생을 인정해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 누구보다도 자식들이 인정해준 그녀의 삶.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여러 해녀들은 말한다. ‘만날 하던거이 걍 합주게.’ ‘뱃살 빼는데 이만한거 어수다~’ 해맑은 웃음 속에 편안한 말들. 지금의 해녀들이 말하는 바다는 더 이상 고달프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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