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전쟁문학 바오 닌(소설가, 베트남)

 

27일 개최된 제주4·3전국문학인 제주대회 국제문학 심포지엄 1부 '역사 속 나의 문학적 저항'에서 발언 중인 바오 닌 소설가(베트남).

사흘 뒤 4월 30일은 베트남의 커다란 축제일입니다. 43년 전 그날 1975년에, 베트남 인민군대의 각 사단은 사이공으로 진격하여, 길고 길었던 항미 전쟁을 드디어 끝장냈습니다.

존경하는 작가 여러분.

저는 1969년 열 입곱 나이에 군에 입대하여, 1975년까지 만 6년 동안 각종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단지 6년에 불과했지만, 우리나라는 1945년부터 1975년까지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1954년 프랑스를 쫓아내자 미국이 그 뒤를 이어 침략전쟁을 벌였기때문입니다. 전쟁의 시초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1858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이후로 1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쟁의 참화를 감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일본, 또 다시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쳐들어왔기에 우리나라 전역은 항상 외국군이 흘러넘쳐 있었습니다. 이중 가장 참혹했던 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자신들의 인명피해를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5만 8천여명 사망, 3십만 5천여명 부상. 그런데 우리나라는 피해규모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단지 3백 5십만에서 4백만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사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습니다. (1975년 현재, 전체 베트남 인구는 4천 5백만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직까지 무덤을 발견하지 못한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3십만의 군인들이 또 있습니다. 그 참혹함의 정도와 파멸의 규모는 도저히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간략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3차 세계대전을 겪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원자폭탄만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했기에 전쟁이 끝난 후, 전장터에서 돌아왔을 때, 승전군인으로서의 영광 안에서도 전쟁이 남긴 슬픔이 가슴에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저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전쟁이 남긴 내 조국과 내 자신의 상처로 인해 제가 작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작가 여러분.

베트남의 역사는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도 독립을 위한 항쟁을 멈추지 않았던 투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백년간의 기나긴 내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예전부터 베트남 문학의 중요한 주제는 전쟁이었습니다. 중국과 몽고군에 맞선 리 트엉 끼엣, 쩐 년 똥, 응웬 짜이, 프랑스에 맞선 응웬 딘 찌에우, 판 보이 쩌우 등의 대문호들은 모두 민족영웅이었습니다. 대시인 응웬 쥬는 18세기 말 격렬한 내전 시기를 거치면서 베트남문학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끼에우전을 창작했습니다.

20세기초에 이르러 현재의 베트남 문자는 한자와 쯔놈을 대체했습니다. 시, 소설, 단편소설을 포괄하여 베트남 문학 전반이 강력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역시 핵심적인 주제는 외세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특히 1954년부터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기간 동안 문학은 거의 완전히 조국의 독립과 통일 투쟁에 기여하는 문학 뿐이었습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특히 북부 베트남은, 소설가나 시인은 전사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글은 일종의 무기였습니다. 소설가와 시인의 임무는 반미항쟁을 위한 선전, 애국심을 추동하고,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1945-1975)의 베트남 문학은 이름 높은 공산혁명가이자 작가인 또 흐우, 쩨 란 비엔, 응웬 딘 티, 응웬 카이, 응웬 반 봉(한국어로 번역된 󰡔하얀 아오자이󰡕의 작가)의 작품들과 더불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이라 불렸습니다.

물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은 베트남 문학의 발전과 독립 항쟁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또한 역시 한계들이 많았습니다. 베트남을 포함한 공산주의 국가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은 정치세력에게 거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았습니다. 작가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 이름 붙은 정치체제를 반드시 지향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어떤 문제를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검열과 검증을 받았습니다. 그 정치적 지향을 따라 쓰지 않는 작가는 비판을 받거나, 심지어 벌을 받고 작품 판매가 금지되었습니다.

스탈린 식의 소비에트 문학과 모택동 식의 중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베트남 작가들을 영웅적인 항쟁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단지 승리에 대한 이야기만 쓸 뿐, 실패와 상실들에 대한 이야기는 회피했습니다. 단지 기쁨만 노래할 쁜 고통에 대해서는 도외시했습니다. 단지 수백만의 혁명과업에 대해 칭송할 뿐 개개인 하나하나가 처한 운명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명백한 한계들로 인해 1975년 이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은 점점 더 낙후되고 정체되었습니다.

취약한 문학성은 1975년 이후의 국가경제 쇠퇴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후과, 그리고 ‘국유화’와 ‘집단화’ 정책에 의해 경제는 심각한 쇠퇴기를 맞았습니다. 게다가 등소평의 중국과 붉은 크메르의 캄보디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단지 소비에트 연방과만 외교관계가 유지되었을 뿐 세계적으로는 고립상황에 처했습니다. 인민의 삶은 전쟁시절보다 더욱더 굶주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수십만명이 조국을 버리고 망망대해에 무작정 몸을 실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들 대부분은 국가의 경제공황 현실 앞에 귀를 막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들은 전쟁 승리에 너무도 오랜 시간 도취한 채 오만에 빠져있었습니다. 여전히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예이론을 계속해서 고수했습니다. 그렇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은 스스로 세계 현대문학 조류들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1986년 이전에 베트남에 번역 소개되고 학교에서 가르친 작품 대부분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의 문학작품이었습니다. 유럽과 미국, 일본, 한국의 현대문학은 아주 극소수만 번역되었습니다. 또한 1975년 이전의 남베트남 문학작품은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남베트남 공화국 체제하에서 도시에 살면서 글을 쓰던 1975년 이전의 소설가와 시인들 대부분은 창작활동을 멈추고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베트남에서 유통이 금지되었습니다.

변화의 바람은 외부에서 먼저 불어왔습니다. 1986년에 소련과 함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냉전체제가 종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베트남에서도 ‘도이 머이(새롭게 바꾼다)’라 불리는 개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이 머이 작업은 정말 많은 커다란 성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경제 분야의 성과가 컸습니다. 나라는 서서히 굶주림과 가난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인민의 삶의 질이 예전보다 더 나아졌습니다.

문학예술 역시 진보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 응웬 반 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학이 결박을 풀고 세상에 나왔다.” 1986년부터 작가들은 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창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열 수준도 느슨해지고, 출판 역시 예전보다 많이 쉬워졌습니다. 베트남 작가협회의 문예주간지에 응웬 후이 티엡, 팜 티 호아이 등 훌륭한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완전히 새롭고 낯설고 자유 정신이 충만한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는 전혀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작가들이었습니다.

 

도이 머이 초기, 상대적으로 편안한 환경 속에서 저는 1987년에 단편 소설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단편소설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의 지향점을 따라서 쓰지 않았습니다. 1991년에 󰡔전쟁의 슬픔󰡕을 출판했고, 심지어 베트남 작가협회는 최고작품상을 제게 수여했습니다.

1987년에 저는 처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저는 ‘참전 예비군 작가’라 불리는 작가군에 속해있었습니다. ‘참전 예비군 작가’란 전쟁 속에서 직접 총을 잡았던 군인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들을 지칭합니다. 저같은 부류의 작가들은 본래 이런 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 민족의 운명과 나라의 현실을 지극히 개별적인 삶과 운명을 통해 체현하고, 또한 미래의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2. 사람이 상황을 만들고 시대를 만든다. 그러나 사람 역시 상황에 속해있고, 또한 시대가 낳은 난민으로 살아간다.

3. 전쟁은 인류의 커다란 비극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이 그렇다. 승전국의 지위에 있다할 지라고 비극적 상처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전쟁을 아름답게 그리거나 전쟁을 칭송하고 과장하여 그린다면 전쟁의 실체를 외면하는 것이고, 베트남 사람과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 관념 속에서 저는 1987년부터 󰡔전쟁의 슬픔󰡕을 쓰기 시작했으며, 1990년에 완성했습니다. 그 때는 신인작가 시절로 아직 작가협회 회원이 아닌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작가협회는 󰡔전쟁의 슬픔󰡕 출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사랑의 숙명󰡕이라고 제목을 바꾸었지만). 작품은 독자들과 베트남 문학계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1991년에 베트남 작가협회 최고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1994년에 랜덤 하우스에서 󰡔전쟁의 슬픔󰡕을 영어로 번역해 영국, 미국, 호주에 출간했습니다. 󰡔전쟁의 슬픔󰡕으로 1994년 영국 인디펜던트 신문의 문학상, 1997년 덴마크의 ALOA 외국문학상, 2011년 일본의 니케이 아시아 문학상, 2016년 한국의 심훈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전쟁의 슬픔󰡕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그리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태국, 일본, 대만, 한국 등 16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두 번에 걸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1999년에는 영어판을 통해 중역한 것이었고, 2012년에는 번역가 하재홍이 직접 베트남어 원본에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1994년부터 󰡔전쟁의 슬픔󰡕은 국가의 언론기관을 통해 많은 문학평론가와 신문기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 대상이 되었습니다. 비난의 초점은 문학성이 아니라 정치성이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비판을 했습니다.

- 󰡔전쟁의 슬픔󰡕은 상처와 상실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다루는 반면, 항전 과정 속의 베트남 사람들의 승리와 영웅성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 󰡔전쟁의 슬픔󰡕은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을 구분하지 않고, 애국 보위 전쟁과 침략전쟁을 구분하지 않았다.

- 󰡔전쟁의 슬픔󰡕은 항미 전쟁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모습을 나쁘게 그렸다.

베트남에서 이런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렇기에 작가협회 지도위원회, 1991년 󰡔전쟁의 슬픔󰡕에 상을 주었던 심사위원들도 무거운 비판을 받았습니다. 󰡔전쟁의 슬픔󰡕에 대해 국가에서 직접, 출판을 금하는 정식 명령은 내리지는 않았지만, 베트남의 모든 출판사들이 더 이상 재판을 찍지 않았습니다. 서점에서도 더 이상 󰡔전쟁의 슬픔󰡕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해적 출판 시장이 있어, 복사본들이 서점 바깥에서 계속 팔렸습니다. 때문에 󰡔전쟁의 슬픔󰡕 베트남어판과 영어번역판이 계속해서 길거리 중심가에서 유통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전자출판물로 󰡔전쟁의 슬픔󰡕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2004년이 되자 ‘여성 출판사’에서 대담하게 󰡔전쟁의 슬픔󰡕 재판을 찍었습니다. 제목은 󰡔사랑의 숙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화부가 금지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2011년에 사이공의 ‘젊은 출판사’가 󰡔전쟁의 슬픔󰡕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써서 출간했고, 2017년까지 11쇄를 찍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슬픔󰡕이 오랜 시간동안 많은 난관을 겪어왔어도 베트남 독자들과 외국인 독자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독자들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2016년에 심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의 슬픔󰡕에 대해 자부심을 갖습니다.

물론, 󰡔전쟁의 슬픔󰡕이 겪었던 난관들은 제게 많은 압박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나는 두 번째 장편소설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단지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과 산문을 신문과 잡지에 실었을 뿐입니다. 더불어서 저는 ‘젊은 문예 신문’의 편집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힘과 시간을 다 끌어모아서, 오래전부터 쓸 계획을 갖고 있던 두 번째 소설을 매듭짓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가제로 지은 제목은 󰡔낯선 자󰡕입니다. 여전히 저는 20세기의 베트남전쟁이 유일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아군인 북베트남 군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군인 남베트남쪽 군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베트남 인민들의 비극적 전쟁을 다룰 생각입니다. 그래서 정말 쓰기 어려습니다. 또한 출판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침내 쓸 작정입니다.

 

존경하는 작가 여러분.

많은 시간이 흘러, 베트남 전쟁은 과거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전쟁을 도무지 잊지 못합니다. 전쟁은 여전히 내 정신 속에서 내 매일의 평범한 삶 속에서 잠시 잠깐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합니다.

전쟁을 겪어야만했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저는 꿈꿉니다. 저는 바랍니다. 우리 이후의 젊은 세대는 영원히 평화 속에 살기를, 영원히 무기와 작별하기를. 물론 저는 이 꿈이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압니다. 작가의 눈으로, 특히 참전 예비군의 눈으로 저는 평탄하고 온화한 평화의 푸른 융단 밑에는 지난 전쟁의 마른 뼈들과 잔해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전쟁 참화의 씨앗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교훈, 고통스런 경험은 전쟁을 실제로 겪고 고통을 받은 우리 세대에게는 아주 깊이 스며들어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값비싼 교훈이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지, 아니면 전달이 되더라도 이내 잊혀져 버릴지, 그래서 실수와 잘못이 반복되고 참화와 고통이 재현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질문 때문에 저는 “전쟁 문학”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글은 전쟁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기 위함입니다. 전쟁에 대해 쓰는 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사랑을, 삶에 대한 사람을, 민족 서로간의 인도적인 마음을, 사람과 사람들 간의 연민의 정을 쓰는 것입니다.

The war literature for peace

Bảo Ninh

 

At the age of 17, Bảo Ninh joined the military and participated in the war for six years. Although he had served in the military for only six years, in the context of Vietnamese history as a whole, the Vietnam War was an extremely long war, which lasted for 130 years after the French invasion in 1858. For this reason, Vietnamese literature i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theme of ‘independence and unification.’

In socialist realism literature ideology, literary work was a type of a combative weapon. Despite making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independence and unification of their homeland, the fact that the literary works disregarded individual scars and losses, shows how it was met with limitations.

After the Vietnamese government authorities implemented the Đổi Mới policy, new works that were considerably different from existing ones poured out, and at its peak, The Sorrow of War was born.

Receiving enthusiastic welcome and praise from readers and writers, The Sorrow of War won the Best Literary Work Award of The Vietnamese Writers Association. However, when the English version of The Sorrow of War was published, literary critics and journalists provoked an argument and harshly criticized the political aspects of the work. Following the incident, the sorrow of war was available only through the street book piracy market for the next 10 years.

Nonetheless, being continuously recognized abroad and consistently loved by readers everywhere, The Sorrow of War has once again, become a steady seller in the Vietnamese publishing market.

In order to never forget the horrible lessons left by the war, Bảo Ninh focuses on war as the sole subject of all his work. He is even working on a new novel based on a South Vietnamese soldier, the enemy, as the protagonist. The war literature he is aiming for is ‘war literature for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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