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時局)이 정상이 아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어수선하고 어지럽기까지 하다. 어둡고 긴 터널처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인류의 대 재앙으로 기록될 ‘코로나 19’가 가져다 준 현상이다. 이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더욱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여기에는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국가 경영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무능과 무책임이 자락을 깔았다. 정치방역에 몰두하는 정부의 독선과 위선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국민적 갈등구조만 심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모두를 절망적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경우는 많지 않다. 어떤 고통도 함께 극복하는 저력을 발휘하던 공동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곳곳에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한다. 청년도 직장인도 그렇다. 자영업자들은 힘들어 죽을 판이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최근 공전(空前)의 히트를 치는 나훈아의 노래 가사처럼 정말 힘든 세상이고 아픈 세월이다.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이다.

12월이면 거리를 흥겹게 하던 크리스마스 캐럴도 사라졌다. 정다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어색해졌다. 오랜만의 식사자리는 물론 따뜻한 대화까지 꺼려지는 상황이다.

마스크와 거리두기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은 고사하고 표정을 읽기도 곤란해 졌다. ‘비대면’ ‘비접촉’ ‘거리두기 침묵’ 등으로 인정이 메말라 삭막해지고 인간관계 역시 각박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BC(Before covid·코로나 이전)시대와 AC(After covid·코로나 이후) 시대로 구분되어질 정도로 모든 생활패턴이나 생활환경이 급격이 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절망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언제 어떻게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불가항력적이고 불가측적인 미래에 대해 누구도 자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짜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고통으로 일그러질 지라도 피하지 말고 극복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어둡고 긴 절망의 터널로 몰아가고 있는 ‘코로나 19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키우고 희망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니체는 1872년에 출판하여 바그너에게 헌정했다는 그의 책 ‘비극의 탄생’에서 “인간이 끝없는 고통에 빠지면 무언가 그 고통에 대한 의미를 찾고, 모두는 그 고통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아 간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끝없는 절망으로 점철된 고통의 삶을 희망으로 엮어내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렇다. 미래에 대한 희망, 어떠한 상황에서도 잠재적 가능성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견디고 부딪치고 몇 번이고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캄캄하여 도저히 살아 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기회를 포기하지 않는 일, “이겨낼 수 있다”,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절망적 위기를 기회로 바뀔 수 있는 힘이요 자양분이다.

‘잠수종과 나비’, 2007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프랑스 영화다. 줄리안 슈나베 감독, 마티유 아말릭 주연의 영화였다. 영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고 줄거리만 읽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패션잡지 ‘엘’ 편집장 출신인 장 도미니크 보비(이하 장)의 실제 이야기라 했다. 한 40대 남성의 눈물겨운 생존의 몸부림과 불굴의 의지를 그린 영화다.

장은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전신이 마비되었다. 신체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 뿐 이었다.

그럼에도 장은 눈꺼풀을 깜박이며 알파벳을 하나하나 눈으로 새겨 조합하는 방식으로 단어를 만들어 소통했다. 그리하여 책을 냈다. 책에서 장은 “남아있는 그것(눈꺼풀)에 감사하다”고 했다.

눈 깜박이로 단어 하나를 만드는 데 3분이 걸렸고 반나절 동안 이렇게 하여 만든 단어는 종이 반쪽을 채우지 못했다.

장은 이렇게 눈 깜박이 언어로 15개월 동안 20만 번 눈을 깜박이면서 130쪽의 책을 남겼다. 그리고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의 성취(책 출간)은 의사와 언어치료사, 물리치료사, 아버지와 아내와 아이들과 뇌수를 쏟아내는 것 같은 장의 불굴의 의지와 영혼이 결합하여 일궈낸 성과라 했다.

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방법까지 빼앗긴 막다른 길, 나에겐 나비처럼 자유로운 세 가지가 있었다. 눈꺼풀, 그리고 상상력과 기억, 난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책을 마무리 했다.

최악의 절망적 상태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으려고 생존의 몸부림을 쳤던 장의 이야기를 되살려 소개하는 의도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 모두 함께 코로나 19가 덮쳐 ‘앞이 캄캄한 시대의 절망을 넘어 희망을 엮어가자’는 뜻을 전하고 싶어서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일이다. 절망의 벽 앞에서도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틈새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다”는 말이 있다. 카뮈도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희망도 없다“고 했었다. 모두 절망을 넘어 희망을 찾자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절망적 코로나 19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물론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절망의 극복은 혼자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의 무게 중심을 나 위주에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승화하는 일이 필요하고 급한 것이다.

서로 서로 이해하고 돕는 일이다. ‘나만 살겠다고,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탐욕은 내남없이 함께 무너지는 지름길이다.

절체절명의 코로나 대유행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이를 극복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지금으로서는 마스크 착용 의무화, 소독과 손 씻기 등 위생철저, 다중모임 회피와 거리두기 유지 등 방역수칙을 지키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어수단이다.

번거롭고 불편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도 이를 지킬 수밖에 없다. 아직은 이것이 유일한 생존수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를 지배할 수 있는 백신이 나올 때까지는 참고 견디며 이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1792~1622)의 시 ‘서풍에 부치는 노래’ 마지막 연이다.

칠흑같이 캄캄한 절망적 ‘코로나 19’가 찬바람 부는 겨울이라면 이를 이겨내고 일상으로 가는 봄은 멀지 않다는 뜻으로 엮고 싶은 시 구절이다.

세월이 하 수상해서 ‘절망을 넘어 희망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