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소희 기자)
26일 양승필 종달리 이장집인 '이안재'에 모여 가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탐방객들. (사진=박소희 기자)

제주에는 '동쪽 사람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는 말이 있다. 제주도 전체가 척박하긴 했지만, 농토가 많은 서쪽에 비해 동쪽은 더 척박해 생존을 위해서는 억척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주 동쪽 구좌읍에 위치한 작은 마을 종달리(終達里). 제주시에서 가장 먼 종달리는 동쪽에서도 척박함이 손에 꼽혀 생존의 자구책으로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하지만 자주정신이 강해 해녀항일운동 등 독립운동가들의 성지기도 하다. 또한 제주 4·3항쟁 당시 '다랑쉬굴 학살' 등 군경 초토화 작전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26일 오후 3시 종달리 초등학교 인근 독립서점 '책약방'에 도착하자, 제주에 '한달살이'를 하러 온 가족, 아버지 외갓집 터를 찾아보고자 왔다는 모녀 등 30여명이 '세대를 잇는 이야기 유랑단-종달 마을 탐방편'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제2수답과 공덕비 (사진=박소희 기자)
제2수답과 공덕비. 멀리 두산봉 보인다.  (사진=박소희 기자)

# 수답 : 염전 간척해 농지로

벼농사가 되지 않아 '곤밥'(쌀밥의 제주어로 고운밥이라는 뜻)이 귀했던 제주도. 제주에서 벼농사를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질 특성의 영향으로 인해 물을 가둘 수 있는 논을 만드는데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달리는 제주에서 최고로 꼽히는 염전이었지만 1957년 종달리 간석지(干潟地-밀물 때에는 잠기고 썰물 때에는 드러나는 땅)를 농지로 간척했다. 종달리에는 1899년 대정 군수를 지낸 채구석(1850~1920)가 시도한 제1수답(水田)과 제15대 구자춘 도지사와 제12대 김인화 북제주군 군수 주도로 추진한 제2수답이 있다.

탐방객들이 도착한 곳은 해방 이후 조성된 제2수답.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직 생활을 했던 양승필(70) 종달리 이장은 놀고 있는 수답을 마을이 활용하고 싶어도 지금은 개인 소유의 땅이라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약 12년 동안 대대적인 간척 공사를 벌여 제2수답을 만들었지만 도외지역에서 쌀이 들어오면서 쌀값이 폭락하자 본업인 밭농사에 더 집중하면서 폐답이 됐다. 이후 동네 아이들의 축구장으로 활용되면서 "종달리가 지역 축구 최강이었던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고 양승필 이장은 설명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제2수답으로 연결되는 수로시설이 끊기며 고여있는 물. 여름이면 모기들이 들끓어 골칫거리가 됐다고 한다. (사진=박소희 기자)

제2수답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두산봉과 지미봉이 자리해 있는데, 참여객들은 간척 당시 두 오름에서 엄청난 양의 흙을 퍼 날랐을 것으로 추정했다. 간척 공사 시공사인 중앙건설이 지미봉의 송이를 채취하는 조건으로 낙후된 공회당을 무상 개축했다고 하니 아주 근거없는 추론도 아니다. 

종달리 갯벌 간척은 조선시대 말에도 시도된 바 있다. 19세기 채구석은 제주도에 벼농사를 지을 구상을 했다. 간석지에 댐을 쌓아 논을 만들었지만 수리시설도 미비하고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해수가 땅 밑으로 솟아나면서 실패했다. 지금은 습지로 변했다.

옛 종달리 공회당 터. 지금은 공회당이라는 이름의 술집으로 운영중이다. (사진=박소희 기자)
옛 종달리 공회당 터. 지금은 리모델링 후 공회당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운영중이다. (사진=박소희 기자)

# 공회당 : 동네 사람들 문화공간이자 학살 터

동네 광장 역할을 하는 마을회관 옆 나무 쉼터를 지나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1930년 설립된 공회당 터가 있다. 마을재산인 이곳은 지금 '공회당'이란 이름으로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공회당은 종달리 주민과 재일동포의 찬조를 얻어 1934년 9월에 준공했다. 마을행사나 회의를 하기도 하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영화관람을 하던 복합문화공간이자 1946년 종달초등학교 개교 전까지는 교육 공간을 대신하기도 했다. 

종달리 공회당은 제주 4·3 항쟁 당시 학살터기도 하다. 

중산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약 1년 전, 1947년 6월 6일 종달리 바닷가에서는 민청조직 개편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대한 정세보고를 겸한 민청대회(대한민주청년동맹)가 열렸다. 당시 마을청년 2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날 단속에 나선 경찰관 3명이 마을 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 당한 이른바 ‘6·6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경찰은 이를 빌미로 71명을 수배하고 43명을 검거했다. 

양승필 이장에 따르면 종달리 청년들은 수배를 피해 일본이나 야산 등으로 도망쳤고, 작년 명예회복이 이뤄진 생존수형인 고태삼(94) 어르신도 이때 급습한 세화지서 경찰관에 끌려갔다." 일반재판을 받은 고태삼 어르신은 소요와 내란실행 방조 혐의로 인천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 억울한 옥살이를 한 지 74년만에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토벌대의 잔혹한 진압 작전을 피해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야산으로 흩어졌고, ‘6·6사건’ 이후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던 종달리도 군경의 총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종달리에 남아 있던 '도피자 가족'들은 이곳 공회당에서 학살당했다. 

승희상회 (사진=박소희 기자)
종달리 승희상회 (사진=박소희 기자)

# '승희상회'와 사라진 동네 사랑방

공회당을 지나 종달 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승희상회’를 만날 수 있다.

가게 이름의 주인공 '한승희'씨는 '한창식' 씨 딸이다. 한창식 씨는 일제치하에서 혁우동맹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주도한 '한원택' 지사와 야학 등을 통해 해녀 항일운동을 지원했던 '한영택' 선생 직계 가족이다. 한영택 선생은 해녀들의 권익 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이다 옥고를 치른 김옥련 애국지사 남편이기도 하다. 

실제 승희상회는 한창식 씨 부인인 김영숙 씨가 운영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몰리자 거리로 나와 양승필 이장이 들려주는 가족 일화를 같이 들었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옛 '영신약포' 자리에서 종달리 마을 설명을 하고 있는 양승필 이장. (사진=박소희 기자)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옛 '영신약포' 자리에서 종달리 마을 설명을 하고 있는 양승필 이장. (사진=박소희 기자)

'승희상회' 맞은편에는 원래 '영신약포'라 약방이었다. 남편 김홍식 씨는 약방을 운영하고, 간호학을 전공한 부인 신범랑 씨는 동네 산파 역할을 자처하며 동네 대소사에 관여했다. 그래서인지 영신약포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책약방 양유정 대표는 "2년 전 향년 94세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땐 이곳이 동네 사랑방이었다"면서 "이제는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사진 박소희 기자)
'진토굿파는 소리' '촐베는 소리' '달구 소리'를 들려준 채태윤 어르신(왼쪽에서 두번 째). (왼쪽부터) 채석유(75), 문군삼(76)어르신과 양승필 이장도 옆에서 소리를 더하고 있다. (사진 박소희 기자)

# 문화와 의식, 사라지는 공동체

책약방에서 출발해 옛 마을회관, 옛 영신약포, 옛 이용원(현 누룸스튜디오), 승희상회, 옛 공회당터, 200년된 초가, 이안재, 중동정미소, 옛 염전까지 돌아본 종달리 탐방객들은 무형문화재 전수자인 '채태윤' 어르신의 민요를 듣기 위해 소심한 책방으로 이동했다. 

과거 마을에 한 사람이 죽으면 상제와 마을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뒤를 따라 갔다. 지금은 장례의식의 간소화로 장례의식요 전승이 단절되고 있는데, '진토굿파는 소리' '촐베는 소리' '달구 소리'를 들려준 채태윤 어르신은 제22-2호 진토굿파는소리 김수길 보유자 전수자다. 채석유(75) 문군삼(76) 어르신과 양승필 이장도 채태윤 어르신 뒤에서 소리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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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낫을 들고 '촐베는 소리'를 부르고 있는 채태윤 어르신과 탐방객들. (사진=박소희 기자)

양승필 이장은 "마을의 문화를 보존하려면 마을사람부터 그 가치를 깨달아야 하는데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면서 마을문화유산도 희미해지는 것 같다"면서 "문화와 사람을 잇는 이런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한편 이 행사는 제주문화예술재단 2022 문화거점 기반 지역문화 활성화사업 '고치:가치 프로젝트' 일환으로 '책약방'과 '소심한책방'이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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