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지방법원 302호 법정 입구(사진=이상영 제공)
제주지방법원 302호 법정 입구(사진=이상영 제공)

아침에 부랴부랴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일찍 법원에 도착했다. 재판이 열리는 302호 법정은 아직 안내 모니터조차 켜지지 않았고, 한 법원 직원은 덜 마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법정 앞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잠시 후, 제주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이번 사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서 대표가 여유롭게 4층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선고를 앞둔 피고인임에도 연신 웃으며 일일이 호화 변호인단과 서로 덕담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 잠시 호흡이 가빠졌다.

제주지방법원 302호 법정 앞 의자에 앉아 재판을 기다렸다. 제주동물테마파크 서경선 대표와 선흘2리 전 이장이 배임혐의로 기소된지 무려 2년 만에 1심 선고를 받는 날이었다. 마침내! 서로 돈을 주고받은 증거들이 뻔히 드러났는데도 이 사람들은 무슨 배짱인지 재판 내내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국내 최대 로펌 변호사들을 선임한 여유일까? 하기사 유전무죄라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게 아니지. 8차례의 재판을 모두 방청하면서 바쁜 일상을 쪼개서 시간을 내는 건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변호사들의 비호를 받으며 뻔뻔하게 내뱉는 사실과 다른 말을 그대로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선고를 하루 앞둔 밤 반대대책위는 보도자료를 두 개 준비했었다. 하나는 서 대표에게 유죄가 선고될 경우를 대비한 ‘환영’ 보도자료와 무죄가 내려질 경우를 대비한 ‘유감과 분노’ 보도자료다. 재판 초기 제비뽑기로 재판정에 들어갈 만큼 치열했던 기자들의 취재 열기도 2년이 넘는 긴 재판으로 인해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미리 보도자료를 뿌려 1심 선고 일정을 알리고 취재도 부탁하려고 했는데, 서경선 대표의 여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전에 알리지 않기를 잘했구나’ 싶어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9시 57분에 판사가 입장했다. 올해 새롭게 부임해 그간의 재판과정을 전혀 지켜보지 못한 판사는 이 복잡하고 너저분한 사건을 모두 파악했을까? 괜히 불안한 마음에 옆자리에 앉은 반대대책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피고인 중 한 명인 전 이장과 눈이 마주쳤고, 이내 서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때는 함께 열심히 반대위 활동도 했었던 전 이장이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가도, 거짓말로 오리발을 내미는 태도에는 연민의 마음조차 싹 사라졌다. 정말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고 있는 걸까?

판사는 피고인 3명을 호명해 신분을 확인한 후 곧바로 선고를 시작했다. 비교적 젊은 외양에 ‘엄근진’ 표정으로 또박또박 빠른 속도로 판결문을 읽어내렸다. 그간 10여건의 소송에 시달린 경험으론 보통 선고는 1~2분이면 끝나는데, 이번 사건은 판결문을 읽는데만 무려 20분의 시간이 흘렀다. (나중에 판결문을 발부받아 확인해 보니 무려 34쪽이었다.) ‘법알못’인 내 귀에는 중간중간 ‘권한남용’, ‘사업자와 긴밀히 소통’, ‘묵시적 청탁’, ‘청탁의 대가’, ‘반성없음’, ‘유죄’ 등의 단어들이 유독 크게 들려왔다.

34쪽에 달하는 방대한 판결문에는 묵시적 청탁의 증거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사진=이상영 제공)
34쪽에 달하는 방대한 판결문에는 묵시적 청탁의 증거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사진=이상영 제공)

34쪽에 달하는 방대한 판결문에는 묵시적 청탁의 증거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재판부는 ‘청탁은 없었고 곤궁한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저 돈을 빌려줬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고받은 금액이 다른 배임사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지만 이로 인해 수년간 극심한 마을 갈등이 촉발되었고 피고인들이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는 점을 들어 검찰이 구형한 징역형(집행유예)에 더해 사회봉사 명령까지 추가했다. 서 대표의 환했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불법은 김앤장 할아버지가 와도 막을 수 없구나!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지난 4년간 사업을 반대해 온 마을 주민으로서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일들이 영화 장면처럼 지나갔다. 징역형이 유예된 데 대해 속이 쓰렸다. 마을 변호사는 재판부가 피고인들이 주고 받은 돈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고 집행유예를 내릴 거라고 진즉에 예측했다. 우리마을 입장에선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에 이번 재판은 실로 통쾌한 결과이자 완벽한 승리였다. 징역형이 확정되면 서 대표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의해 대표직에서 사임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마을 일을 도와주시는 변호사는 사람들이 변호사를 고용할 때 늘 ‘변호사를 샀다’라는 표현을 쓴다고 씁쓸해 한 적이 있다. 재벌 2세이자 국내 굴지 건설회사를 운영하시는 서 대표에게는 변호사를 많이 ‘사는 일’이 어렵지 않겠지만, 제주에서 가난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마을 주민들은 그때 그때 법적인 도움을 받기조차 힘들다. 오죽하면 법과 제도로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한 약자들이 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복수극에 온 국민이 열광했을까.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다행히 우리마을에는 돈 안되는 일에 발벗고 나서주신 변호사들이 계셨다. ‘사회봉사명령’이 돈 많은 사장들에게 얼마나 골치아픈 형벌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우리 마을 변호사는 그간 맡아오던 여러 사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남태평양 타이티로 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다. 4년 동안 법률대책회의(?)를 가장한 숱한 술자리 때마다 타이티의 어느 섬에서 라면가게를 차릴 거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늘상 외쳤으니, 그 꿈이 이루어지면 나도 이번 이장 임기를 끝내고 시찰 겸 놀러나 가봐야겠다.

참! 법무부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사회봉사국민공모제’라는 게 있다. 일반국민이 도움을 요청하면 법무부에서 심사해서 사회봉사명령대상자를 투입해 무상으로 지원하는 제도라고 한다. 서 대표의 사회봉사명령이 확정되면 선흘2리 마을회에서 법무부에 공모를 신청해, 서 대표가 리사무소에서 마을주민을 위해 속죄하며 봉사할 기회를 주는 걸 적극 검토하고 있다.

덧붙이는 말. 서 대표와 전 이장은 일주일 뒤 곧바로 항소했다.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마을회장 이상영 씨는 '20년간 학교에서 지리와 사회를 가르치다 제주로 이주한 지 3년째인 초보 제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년 전에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이 된 후, 최근 이장으로 선출·임명되었다. 1973년생인 이상영 이장의 고군분투 마을공동체회복기를 매달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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