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1374년 목호 토벌 11개 성씨 귀화

▲ 1세기 동안 제주를 지배했던 마지막 목호가 떨어져 죽은 범섬

1264년 정월에 원의 세조(世祖)가 죽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충렬왕(忠烈王)은 공주왕비와 함께 연경으로 가서 탐라를 고려에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서 탐라의 통치권은 형식적으로는 회복되었으나 원에서는 여전히 말 목장으로 사용하고, 이에 따른 관원을 파견하였으므로 회복은 말뿐이었다. 그러다가 1368년 8월에 원의 순제(順帝)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쫓겨 북으로 달아났다.

이에 이듬해부터 고려 조정에서는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이 무렵 탐라의 통치권이 고려에 귀속된다. 그러나 제주 목장을 관리하던 목호(牧胡)들은 반란을 꾀하는 등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이에 1374년 7월 고려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제주행병도통사(濟州行兵都統使)로 삼아 제주에 남아있는 목호(牧胡)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해 8월 포획한 왜선 300척에 병사들을 나눠 태우고 진도를 출발했다.
도중에 센바람을 만나 고생도 하고, 배도 30여 척이나 잃었다. 그 때문에 추자도에 들러 바람 자기를 기다리다가 8월 28일 지금 한림 지경인 명월포로 제주에 들어왔다. 지금도 추자도 대서리(大西里) 뒷산에는 최영 사당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음력 2월 15일에 제사를 드리는데 그가 제주로 올 때 이곳에 머물며 그물 깁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은공 갚기이다.

최영 장군은 신임 제주 목사 박윤청(朴允淸)을 목호에게 보내 귀순을 종용했으나 그들은 이하생(李夏生) 목사와 선발대로 상륙한 11척에 탄 군인들을 모조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드디어 최영의 군사가 상륙하여 지금 어음리와 금악, 서귀포시 서홍동 지경까지 돌아다니며 그들을 무찔렀다. 마침내 쫓긴 그들은 배를 타고 지금 서귀포시 법환동 앞의 범섬으로 달아났다.

지금 법환동 포구를 ‘막숙(幕宿)’이라 부르고 그 서쪽에 ‘배연줄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서호동 중심에는 ‘막동산’이 있는데 모두 최영의 군사들이 범섬의 목호들을 치러 갈 때 머물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막을 지어 숙영을 하거나, 배들로 다리를 놓아 범섬의 목호들을 쳤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잡힐 것이 두려워진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등 목호들이 스스로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이로서 1세기 동안 몽골의 목장이었던 제주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 그물 깁는 법을 가르쳐준 은공을 갚기위해 세운 최영장군 사당
이들은 갔지만 그러나 이들이 남긴 영향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도 제주의
갓난아기들은 엉덩이에 퍼런 몽골반점을 달고 있다. 이원진(李元鎭) 목사가 1653년에 간행한 <탐라지(耽羅志)>에 따르면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강(康)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 11개 성씨가 이때 귀화했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본관을 대원(大元)이라고 사용해오다가 차츰 다른 것으로 바꾼 성씨도 있다.

100년 동안 탐라 지배 몽골문화 잔존

지금 60~70대 사람들이 어려서 할머니로부터 “몽곳 놈 X으로 맹그라 분 거”라는 욕을 들으며 자랐는데, 무심코 뱉은 그 욕설 속에 서글픈 우리의 역사가 배어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1세기만에 물러갔으나 그들이 남긴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와 의복에서 잘 나타나 있다. 석주명(石宙明)은 그의 <제주도 방언집>에서 제주어와 몽골어가 “가장 동질성이 짙다”는 보고를 한 바 있다. 그것은 그뿐만 아니라 몽골이 개방되면서 최근 몇 해 동안에 우리 언어학자들이 그 나라로 가고, 그 나라 학자들이 제주도로 오면서 더욱 확인이 되고 있다.

제주에서 회색 말을 ‘가라?’이라고 하는데, 몽고말도 같으며, 이랑을 ‘고지’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같다. 그밖에 파를 ‘마농’이라고 하는 거나 망태기를 ‘약돌기’라고 하는 것, 올려바지를 ‘오릇’이라고 하는 것 등이 모두 같다고 한다.

필자는 몇 년 전에 몽골엘 자주 다니는 한 인사가 박물관을 차릴 목적으로 몽골로부터 여러 가지 의복들을 들여온 것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특히 사냥꾼들의 가죽옷들이 거의 우리 것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 그밖에 말안장 같은 타는 기구도 상당히 비슷했다.

100년이란 세월은 이렇듯 많은 영향을 이 섬에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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