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처음 의녀 김만덕(金萬德)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여 년 전 서울의 한인문화연구원(韓印文化硏究院)에 들렀다가 그곳 원장이며 시인인 김모 여사가 들고 다니던 보따리를 보게 되면서였다.

그 보따리 속에 그녀는 시가 쪽 어른이신 채제공(蔡濟恭)의 문집을 갖고 있었으며, 거기 김만덕의 전집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배려로 채제공의 <김만덕전>을 복사하여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인연이었다.

3~4년 전에 ‘만덕봉사회’를 이끌어오던 한상수 여사의 부탁으로 만덕을 연극으로 올리기 위한 희곡 집필을 의뢰 받아서 자료를 모으고, 완성해 놓았으나 원체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이라 성사하지 못한 채 그녀는 물러나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최근 재경제주도민회를 중심으로 단체를 정비하고, 여러 학계가 힘을 합쳐 그녀의 행적을 주제로 세미나를 여는 것을 보며 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녀의 얼굴을 돈의 주인공으로 도안해 넣자는 움직임도 있으나 화폐 제조를 담당한 부처에서 그 안을 받아들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만덕은 본관이 김해로 조선조 영조 15년(1739년) 제주시의 가난한 집  김응열(金應悅)의 삼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열세 살 되는 해에 전염병이 돌아 부모를 다 잃게 되니 오라비 만석(萬碩)과 만재(萬才)는 친척집에 목동으로 가고, 만덕은 기방에 의탁되었다. 이것은 기막힌 드라마의 서두다.

당시 실정으로 그녀가 자라서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20여 세가 되었을 때 자기 신분을 관에 소상히 알리고 기적에서 빠져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녀가 범상한 인물이 아닌 것이 드러나며, 관리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던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그녀는 바로 식산(殖産)에 전염하여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빠르게 축재를 할 수 있었던 데도 그녀의 범상치 않음이 드러난다.

정조 18년(1794년) 8월에 태풍이 불었는데, 그 무렵 제주 목사 심낙수(沈樂洙)가 임금님께 보고한 것을 보면 “온 섬이 비로 쓸어버린 것 같아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실상이 눈에 선하다. 그 이듬해 봄에 진휼곡을 싣고 오던 수송선 5척이 침몰했으니 제주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꼴이었다.

만덕이 자기 돈 천금(千金)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고, 그것으로 친족들 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도 구휼했다. 속설에는 관덕정 마당에 솥을 걸고 죽을 쑤며 주린 사람들에게 먹였다고 하니 요즘이야 더러 급식소가 있지만 그때로서는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천금이라는 돈이 지금 얼마나 큰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상황이 끝났을 때 임금이 제주 목사에게 회유하여 “만덕의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고 했으며, 만덕은 “서울에 가서 임금님을 한 번 뵙고,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답했다.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져서 정조 20년(1796년) 가을에 상경하게 된다.

조정이 그녀에게 내의원 의녀반수(內醫院 醫女斑首)라는 벼슬을 내린 것은 당시 보통 사람으로는 궁궐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좌의정 채제공에게 ‘김만덕전’까지 쓰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제주 여인이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그녀를 기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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