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향고 태조원년 교동에 첫 건립
토호들 신군부에 줄서기…말 조공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년) 음력 5월 23일에 한국 역사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이 그것이다. 그의 회군 이유는 “상국(上國) 지경을 범하면 천자께 죄를 짓는다”는 핑계였다.

역사학자이며 우리 전 시대 최고의 지성인 함석헌(咸錫憲) 선생은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날에 대해 “한민족의 가슴에서 옛터를 찾자는 생각을 아주 마지막으로 긁어버린 날이며,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해버린 날”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 대해 “이조 한 대의 역사는 한마디로 중축(中軸)이 부러진 역사”라고 혹평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이성계는 공양왕 4년(1392년) 7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민중들의 호응을 못 받고 있었으므로 건국 초부터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펴나갔다. 따라서 변방인 제주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내지화(內地化) 정책을 폈으며, 파견되는 관원의 권한도 강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년) 3월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주에 향교를 설치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전 중추절제사 황군서(黃君瑞)를 제주에 보내 도민을 달래게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가 매우 마음이 급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제주향교의 연혁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근거로 제주향교가 태조 원년인 1392년에 제주시 원정로 이른바 교동(校洞)에 건립되었으며, 그 후 이 부근에 제주북초등학교가 들어섰다.

그 후 1582년 제주향교는 가락천 동편 고령전(高齡田: 과거 제주영락교회가 있던 솔개동산 앞쪽)으로 옮겨지었다가, 다시 1755년에는 제주시 이도2동 광양으로 옮기고, 1827년 이행교(李行敎) 목사 때에 비로소 고상신(高相信)이 대지 4639평을 기증함에 따라 용담1동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을 모신 대성전과 성인들이 조상을 모신 계성사(啓聖祠), 명륜당 등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문명학원도 있어 한문과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이 향교는 1971년 8월 제주도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봄가을에 대성전에서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드리고 있다.

이 무렵 제주에서는 소위 신군부(新軍部)에 환심을 사려고 토호들로부터 말을 바치는 행위가 빈번해진다. 태조 3년 7월에 제주 사람 고봉례(高鳳禮) 등이 말 100필을 바치자 태조가 쌀 100석을 하사했으며, 이듬해에는 문충보(文忠甫)가 좋은 말 7필을 바치자 음식을 내린 일이 있다. 이밖에도 더 말을 바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임금은 비단을 하사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좀더 적극적이 된다. 임금이 제주 만호 김천신(金天伸)에게 비단 2필과 술 200병을 내리면서 해마다 소와 말 100필씩을 바치게 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 축마점고사(畜馬點考使) 여칭(呂稱)과 감찰 박안의(朴安義)를 시켜 제주의 소와 말을 조사하고 적(籍)을 만들었는데, 말은 4,414필, 소는 1,914두였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 4년(1404년) 5월 그때까지 세습해오던 벼슬 성주(星主), 왕자(王子) 제도를 없애고,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바꿨다가 세종 27년(1445년)에는 이 벼슬마저 없앴으므로 제주에는 아주 귀족이 없어졌다.

태종 8년(1408년) 몽골 시대의 제도를 고쳐서 감목관(監牧官) 2명과 진무(鎭撫) 4명을 두어 제주의 목장을 관리하게 했다. 이때부터 제주에서 세금 바치는 공부(貢賦)를 말로 정했는데, 큰집은 1년에 큰말 1필, 중간 집은 중마 1필, 작은 집들은 5호가 어울려서 중마 1필을 바쳤는데, 탈 수 있는 말이라야 했다. 태종 9년(1409년) 12월 비로소 제주 사람에게도 서울 가서 벼슬을 살게 제도적으로 허락했다. 말 가진 사람에게는 무역도 할 수 있게 했다.

태종 11년(1411년) 1월에 제주성(濟州城)을 쌓도록 했다. 지금 오현단(五賢壇) 바깥에 그 성 일부가 복원돼 있는데, 당시 성의 남문은 현 남문로터리에서 중앙천주교회로 가는 어귀에 있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반원형으로 바다를 향해 성이 둘려있었다. 식민지 시대까지 성이 남아있었으나 일제가 제주항 공사를 할 때 모두 날라다 써버리고, 그 자리는 길을 뺐다.

그들로서는 그들 조상인 왜구들을 방어했던 성 굽을 짓밟는 쾌감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제주성내교회 앞길이 서쪽 성이 있었던 자리이며, 서문로터리는 성밖에 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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