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년반 전인 2001년도에 오두철군이 야구 유학차 일본에 왔다. 제주 제일중학교를 졸업해서 쿄오토에 있는 '쿄오토 한국학원'(현 쿄오토 국제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주에서 일본까지 야구 유학 왔다고 해서 당학교가 야구로 유명한 학교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당시 쿄오토 한국학원은 민족계학교로서 중.고등학교 학생 수를 전부 합해도 백십여명이었고 야구부원은 2000년도가 16명이었다. 야구부는 그 전해에 창설되어 그때는 고작 10명이었다.

이 학교에 오두철군과 같은 일중 출신인 항목(荒木) 치승군과(아버지가 일본인이라고 함) 둘이서 일본으로 왔던 것이다. 본인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용기있는 결단력속에 일본에 왔을 것이며 보냈을 것이다.

이들의 야구 유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원동력이 된 사람이 바로 쿄오토 한국학원의 야구 감독인 김건박(金健博 29세)선생이었다.

그는 일본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실업야구)에 입단했으나 그해에 야구팀이 도산으로 인해 한국학원 체육선생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야구부를 창설하고 감독까지 맡게 되었는데 부원은 10명에 불과했다.

 부모의 본적지가 조천읍이고 일본 태생인 그는 '이쿠토 화이타'라는 어린이 야구팀과 제주를 방문했다. '이쿠노 화이타'는 매년 제주에 가서 친선 시합을 갖는 팀인데 대표는 일본태생인 제주인이었다.

이런한 인연으로 제주에 갔던 김 선생은 당시 제일중학교 재학중이었던 오두철군과 항목 치승군을 스카웃 하고 직접 지도하게 되었다.

한국학원에 처음으로 야구부를 창설하고 '일본 전국 야구대회'  쿄오토 예선대회에 참가하게 된 한국학원은 메스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첫 시합은 참패 중의 참패였다. 34:0 이라는 굴욕적인 점수 차이로 콜드 시합으로 지고 말았다.

전년도 일본 고교 야구의 성지 코오시엔(甲子園)에서 전국 준우승을 차지한 상대팀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막 창설한 한국학원의 야구부원의 실력 또한 선수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굴하지 않는 김 선생은 제주까지 가서 야구부원들을 스카웃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그 결과 쿄오토 예선대회에 참가하는 77개의 고교 중에서 재작년에는 베스트 16강 작년은 8강 금년은 베스트 16강에 들어섰다.

경이로운 실력 향상에 사람들은 기적에 가깝다고 하지만 이 말은 야구부원이나 김 감독에 대하여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피와 땀과 노력으로 이룬 결과이지 결코 기적이 아니다. 오 군도 언어 장벽을 극복하면서 캣쳐로서 맹활약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십명으로 출발한 야구부원이 지금은 중.고교 합해서 모두 120명의 전교생 중 34명의 야구부원이 있다. 김 선생의 당당한 도전의 승리이다.

금년 3월에 졸업한 오두철 군은 오오사카후 마쓰바라(松原)시에 있는 한남대학(限南大學)에 입학 후, 포수로서 활약하고 있다. (항목 치승군은 토오쿄 아시아 대학에 입학 후 야구부에서 활약 중)

오두철 군은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대학 입학후부터는 고교 재학 중부터 1년 선배인 김광극 군의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김광극 군은 '이쿠토화이타'소속으로 제주에 갔다 온 적이 있으며, 한국학원에서는 11루수만 경험 않고 각 포지션은 물론 전 타순을 경험한 투수이다. 지금은 한남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며 동 대학을 대표하는 피쳐로 활약 중인데 고교 때부터 친했던 오두철 군과 같이 살면서 사생활 면에서도 좋은 선배이다.

이것은 그들의 선후배간에 낳은 우정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김광극 군의 부모의 헌신적인 배려도 무시 못한다. 본적지가 제주시인 김 군의 부친은(김병문 55세) 동포 2세이다. 그는 좁은 주거 환경 속에서도 오 군의 동거를 대환영했으며 부인과 함께 자식처럼 돌보고 있다.

오두철 군의 아버지는 오창권씨(54세)이며 어머니는 김선희씨(50세)이다. 제주시 연동에 거주하면서 중앙로에서(제주의료기상사)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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