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희생자 유족이 행방불명인표석에 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4·3 희생자 유족이 행방불명인표석에 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박지희 기자)

끝나지 않은 시간

올봄, 4‧3 75주년 추념일 행사가 있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무력탄압이었음을 사과한 바가 있다. 하지만 올해는 대통령도 참석하지 않은 추념행사였다. 대통령이 참석하든 안하든 그게 본질은 아니다. 아직도 묻힌 진실은 많을 것이라는 게 본질이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은 절박하고 시급해졌다. 

 4‧3과 여성의 기억을 드러내 표현한 것은 아마도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1978)이 처음일 것이다. 이 소설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기 보다는 ‘순이삼촌’의 죽음을 통해 제주사람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보여줬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것도 직접 말하기 방식을 피해 소설이라는 은유적 장치를 택했다. 그것마저도 죄가 돼 작가는 엄청난 여러해에 걸친 악몽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1987년 이후, 제주4‧3연구소를 필두로 이루어진 4‧3의 진실규명을 위한 증언 구술채록 작업이 본격화됐다. 『이제야 말햄수다1,2』(제주4‧3연구소, 한울, 1989), 『4‧3은 말한다1~5권』(제민일보4‧3취재반, 1994년~1998), 『제주 4.3 사건 1000인 증언채록 사업 1-15권』(제주4‧3연구소, 2007), 『그늘 속의 4.3-死.삶과 기억』(제주4.3연구소, 도서출판 선인, 2009), 『4‧3과 여성1~4권』(제주4‧3연구소, 2022) 등이 그 증거물이다.

이들 구술자료집에 수록된 이들의 목소리는 4‧3의 피해자 및 유족이 국가권력에 의해 얼마나 억울한 피해를 당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쉽다. 4‧3을 ‘사건으로서 사실’ 확인에만 몰입한 결과다. 구술자료집에서 여성은 대체로 주변인물이며 목격자, 피해자일 뿐이다. 

이마고 제주아카이브센터 『북촌리 4.3 시그림 책 '영혼을 돌아보지 마라'』
이마고 제주아카이브센터 『북촌리 4.3 시그림 책 '영혼을 돌아보지 마라'』

4‧3과 여성의 기억

이제껏 역사가 여성을 기록하는 방식은 무력한 희생자이거나 영웅의 조력자다. 구어체로 말하면, “가족을 위해 평생 고생만 한 사람”이다. 개인의 삶에서나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주변인이다. 내 손으로, 내 목소리로, 내 의지로 이뤄낸 게 가족들 뒷바라지 뿐인가?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4‧3과 여성의 기억’을 채록하고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들려주려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주여민회는 2018년 본격적으로 4‧3을 체험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구술채록작업을 시작했다. 2022년까지 80세~103세에 이르는 약 160여 명의 어르신 구술채록을 마쳤다. 모든 인터뷰 내용은 영상과 문서기록(제주어, 표준어 전사)으로 보관하고 있다. 향후 아카이브 과정과 공개의 문제는 그 시점과 형식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한다. 

개인 또는 예술인, 연구모임, 동아리, 임의단체 등에서 4‧3과 여성의 기억을 기록하고 창작물을 발표하는 사례도 부쩍 늘어나고 있다. 문자텍스트로는 『4‧3과 여성1~4권』(제주4‧3연구소), 『북촌리 4.3 시그림 책 '영혼을 돌아보지 마라'』(이마고 제주아카이브센터), 『의귀리 4.3 시그림 책 '나는 슬픈 아이여수다'』(이마고 제주아카이브센터), 『인동꽃 아이』(강영자, 한그루, 2022),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양경인, 은행니무, 2022) 등이 있다.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양경인, 은행니무, 2022)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양경인, 은행니무, 2022)

 

문학적 기억의 방식

아버지는 할아버지 옆에 앉고

나는 할머니 옆에 앉고

어머니는 오라비 손잡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옴팡밭에 먼저 끌려가고

나는 신발도 벗겨지면서 할머니와 끌려가고

어머니와 오라비는 어디 있는지 모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총 맞는 걸 보면서

할머니도 울고 나도 울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소리가 들렸어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영혼을 돌아보지 말고 가라

돌아보면 쏜다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어

-이영자 할머니 시, 「영혼을 돌아보지 마라」전문

북촌리에서 4‧3을 겪은 이영자 할머니의 시다. 옴팡밭으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숱한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던 충격을 시로 나타냈다. ‘목격자’로서 개인의 체험을 시로 승화된 구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열세 살부터 시작한 물질. 아침에 배를 타러 테왁(해녀가 몸을 띄우기 위해 쓰는 뒤웅박)과 망사리를 옆에 끼고 소중이(속옷) 바람으로 바닷가에 나갈 때,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마을에서 내가 장구 치고 노래할 때면 사람들은 앉은뱅이도 일어서 춤춘다고 했다.”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중에서)

제9회 4‧3평화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의 주인공 김진언 할머니의 말이다. 김진언 할머니는 1949년 제주에서 체포돼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북으로 건너갔다. 이후 남파되었다가 체포돼 25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녀가 말하는 4‧3은 인간해방이었다. 축첩제도를 비롯한 가부장제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어떠한 폭력에도 결연히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와 행동이었다. 그 표현의 결과는 감옥살이, 딸과의 이별, 동네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운명이었다. “내가 죽으면 발표하라”는 부탁을 작가는 지켰다. 고인은 작가의 필체로 다시 살아나 쩌렁쩌렁한 항쟁의 서릿발로 몸서리치게 한다. 

영화 '비념' 스틸컷.

떠도는 영혼은 돌고 돌아 다시 예술로

영화로도 제작된 ‘4‧3과 여성의 기억’이 있다. 임흥순 감독의 영화 <비념>(2012), <우리를 갈라놓은 것들>(2017),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 등이다.

<비념>은 강상희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주인공 강상희 할머니는 4‧3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간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는 기운은 심상찮다. 원통함을 풀지 못한 영혼이 그녀가 살고 있는 납읍리를 돌고,  가시리, 강정마을, 일본 오사카까지도 날아간다. 일종의 설치미술을 방불케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 혼란스런 영혼의 바람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은 돌고 돌아 다시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잠시 쉰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맡에는 녹슨 톱이 숨겨져 있다. 죽이려는 자, 언제든 일어서서 맞서 싸우야 할 것만 같은 녹슨 톱. 그것은 악몽의 흔적이거니와 항쟁의 무기이다. 

 <우리를 갈라놓은 것들>에서 김동일 할머니는 ‘제주 4.3 반제반미항쟁 전사’로 그려진다. 조천항일운동가의 딸로 4‧3 당시 연락책으로 활동했지만 빨갱이로 낙인찍혀 일본으로 밀항했던 한 여성의 삶. 그녀의 유품은 방안에 가득 모아둔 각종 기념품들과 옷들이다. 왜 그렇게 많은 옷들을 모아두었는지 알 수 없다. 일종의 집착에 의한 중독 증세라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트라우마의 한 증거이며,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한맺힌 몸부림이다. 임흥순 감독은 고인이 남긴 2000여벌의 옷을 인수받아 뜨개질 설치물로 창작해 전시할 예정이다. 

여성, 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기록돼야

역사란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편집되고 해석된 과거의 논리적 얼개이다. 그동안 진행되었던 수천에 이르는 수의 4‧3구술작업은 말 그대로 사실증언을 목표로 한 양적 개량화 작업의 일환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질문에 충실한 답을 요구하는 구술이었던 것이다. 말하고 들음에 있어서도 권력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4‧3은 여성에게 있어 살아남은 자의 죄값을 톡톡히 치른 수난사이자, 투쟁사, 독립사다. 자신과 가족, 마을 공동체,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각기 다른 내용과 방식으로 살아낸 자들의 목소리다. “고생 많이 한 제주 여성”이라는 말은 들을수록 지긋지긋하다.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서 여성, 역사의 씨줄날줄을 뜨개질한 여성, 강요된 침묵이 몸으로 발화되는 여성의 목소리를 추적하는 일은 계속돼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더러의 문학적 상상력과 인권적 감수성이 더욱 요구된다. 내 누이, 내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이 거기, 있음을 잊지 말자. 그래야만 보이고, 그래야 기록될 수 있는 것이 있을테니까. 기록된 것만이 역사가 되니까 이또한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시인이 되었고,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개인 또는 시대를 기록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의 몫은 아닙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주,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것도 정해지지 않은 백지의 상태에서 누구의 목소리부터 들어봐야 할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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