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신형철 씀, 난다 펴냄)
《인생의 역사》(신형철 씀, 난다 펴냄)

나는 제주도에서 작은 책방을 꾸리고 있다. 책방 일만 30년을 했다. 내 첫 일터는 책방이다. 마지막 일터도 책방이었으며 한다. 하지만 동네책방은 책만 팔아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 요즘은 편의점에서 날품팔이를 하면서 목숨 줄을 잇는다.

책방을 오래 하다 보니 책방에 온 손님들에게 책을 권해줄 때가 많다. 책방에서 책읽기모임을 일곱 개를 하고 있지만 모임에서 읽는 책들이 모두 권할 만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모임에서 읽었다. 모임에 온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사람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좋아했다. 나는 좀 생각이 달랐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좀 웃기게 다뤄서 불편했다.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라고 딸도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가졌던 아버지를 철지난 생각을 고집하는 늙은이로 보는 듯했다. 또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조차도 반은 농담으로 사회주의 신념을 갖는 듯 보여서 불편했다.

사회주의가 답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늙은 사회주의자가 똥고집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답답함이 보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돈에 눈이 먼 자본주의 세상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사회주의 사상을 더욱 혐오하진 않을까. 우리는 아직도 한 번도 제대로 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안아오지 않았다. 책방에서 이 책을 권해주기 조심스러운 이유다.

다음으론 천현우가 쓴 《쇳밥일지》를 읽었다. 이 책은 모임 책은 아니다. 노동자가 쓴 세상을 보고 싶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살아온 아이다.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와 살면서 평생을 돈이 없어서 공장 일을 한다. 용접공을 하면서 글을 쓰다가 지금은 기자가 되었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노동자와 싸웠다. 아니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세상에 맞서야 했다. 글들이 몸으로 느낀 것이어서 살갗에 와 닿았다. 하지만 글이 아름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름답게 쓰려고 애썼다. 공장 풍경을 그릴 때 지나치게 멋있게 쓰려 했다. 또 노동자들이 하는 거친 입담들이 구수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울리지 않을 때도 많았다.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다는 지식욕도 조금 불편했다. 이 책도 책방에서 선뜻 권해주기 힘들지 싶다. 앞으로 천현우는 노동자의 아픔을 다루는 좋은 기자가 되리라.

이제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를 보자. ‘인간사’도 아니고 ‘인생의 역사’다. 모두 한자지만 좀 다르다. ‘인간사’라고 하면 ‘사람의 역사’이니 역사책에서 다룰 말이다. ‘인생의 역사’는 ‘사람이 살아온 역사’다. 사실 ‘인생’이라는 말만 해도 ‘사람이 살아온 역사’인데 ‘인생의 역사’라고 하면 좀 더 사람이 살아온, 살아갈 역사를 말하는 듯도 싶다. 지금 이렇게 쓴 것이 신형철 화법이 아닐까. 신형철은 싫겠지만 조심스럽게 말해 본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말했다. 이 땅이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다음 세 가지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자전거와 도서관과 시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서 시를 읽고 쓴다면 살 힘이 난다고. 자전거는 사람이 만든 물건 가운데 자연을 더럽히지 않는 기계다. 도서관은 사람이 언어로 지은 집이다. 그 도서관에 있는 고전들은 사람들이 살면서 느꼈던 슬기가 들어있다. 시는 짧은 글이지만 사람 마음을 울리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나는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세 가지에 하나를 더하고 싶다. 농사꾼이다. 바로 땅을 일구는 일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더럽히지 않으며 먹을거리를 거두는 농사꾼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 생각들을 떠올렸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뉘우치고 세상도 올곧게 본다.

사람들은 시를 읽기 힘들다고 한다. 짧은 글에 마음을 담다보니 은유와 상징이 많다. 이상이 한 말이 떠오른다. 이상은 1910년 조선에서 태어나서 1937년 일본에서 죽었다. 일제강점기에 나고 죽었다. 그가 낸 시집 오감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상은 일본에 가서 많이 아팠다. 하지만 조선에 있는 나이 든 어머니가 걱정이 돼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받은 누이동생도 답장을 일본으로 보냈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놀랐다. 이상이 쓴 편지에는 정이 넘쳤다. 어머니와 어머니를 보살피는 누이동생을 생각하는 따뜻한 말들을 쉽게 썼다. 누이동생도 이런 편지를 쓰는 오빠가 놀라서 물었다. 왜 오라버니는 시는 그렇게 어렵게 쓰면서 편지는 이렇게 쉽게 쓰세요. 이상은 말했다. 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단다. 이렇게 말하면서 누이동생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시를 곱씹어 읽어야 할 이유다. 신형철은 그것을 했고 책으로 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가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이다. 시인도 자기가 쓴 시가 사람들이 잘 읽어주기를 바란다. ‘인생의 역사’ 책에 나온 시들을 쓴 시인들은 어떤 마음일까. 시인이 쓴 시들을 제대로 이해해서 기쁜 마음일까. 아니면 시인이 생각하는 뜻과 다른 부분도 있어서 불편할까. “한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 시는 말하지만, 작품은 길과 달라서, 우리는 시의 맨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남김없이 다 걸어도 된다.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246쪽)” 이렇게 신형철은 말한다. 이 말은 시인이 쓴 시가 읽는 이에 따라서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시를 읽는 정답은 없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한다. 학교 시험에는 시를 해석하는 문제들이 많이 나온다. 언젠가 시인들이 모여서 자기가 쓴 시가 나온 시험지를 받아서 문제를 풀었다. 시인들 평균 점수가 60점을 못 넘었다고 한다. 이 말은 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는 한 가지 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 있다. 시를 어떻게 읽었다고 쓴 책을 읽는 것은 그 시를 잘못 보거나, 틀 안에 가두는 꼴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평론가들은 없어져야 할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평론가도 하나의 독자로 보면 그만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론가가 말을 한 대로 따라 읽지 않기를 바란다. 이상이 쓴 오감도가 어렵다고 오감도를 해석한 책들을 읽으며 이해하는 것은 좋은 책읽기가 아니다. 오감도를 한 번 읽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열 번 백 번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슬쩍 오감도를 잘 이해했다고 쓴 글을 한 번쯤 읽는 것도 괜찮겠다.

《인생의 역사》를 두 번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땐, 마음이 불편했다. 세 가지 점이 걸렸다. 첫째는 꼭 서구 사상들을 이곳저곳에 끼워 넣어야 할까. 둘째는 말을 앞뒤로 꼬여 쓴 것이 많았다. 셋째는 관념어들이 많았다. 이런 것이 읽기 힘들게 했다. 그래도 글을 읽다보면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동감을 주었다. 아픈 마음을 다독이는 따뜻한 정과 사랑이 흘러서 끝까지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땐 앞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다르게 다가왔다. 서양 사상이 적절하게 들어가 글이 좀 더 쉽게 읽혔다. 말을 적절하게 앞뒤로 바꾸니 글을 읽는 맛이 살아났다. 관념어를 쓰지 않고 글을 쓰긴 힘들겠구나 싶었다.

“광부와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부르짖던 시대도 있었지만, 진정한 유토피아는, 이처럼 광부와 농민이 이해 못할 작품이 없을 만큼 그들에게 교육과 시간이 제공되는 사회다.”(200쪽) 이 말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신형철이 쓴 글들을 누가 읽을까. 농사꾼, 노동자, 도시빈민이 읽을까. 아니다. 지식인이다.

신형철은 글을 쓰는 자세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좋은 글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 낼 수 있는 문장이 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253쪽)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기에 신형철이 쓴 글은 깔끔하다. 세월호 참사와 광주항쟁, 촛불항쟁, 박근혜 탄핵과 민중들 아픔을 다룰 때도 중심을 잡고 마음 한 복판을 건드린다.

나는 신형철과 다른 글쓰기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초등학교 5학년도 알 수 있도록 싶게 쓴다. 둘째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쓴다. 셋째는 16절지 한 두 장 분량으로 짧게 쓴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 신형철의 글을 읽을 때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와 신형철이 생각하는 글쓰기는 꼭 다르지만은 않다. 바로 세상을 보는 눈이다. 세계관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168쪽)

나는 글을 쓰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을 하나만 뽑으라면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상도 중립은 없다. 한 때 순수문학이니 참여문학이니 하면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순수문학이란 없다. 내 기준에 문학비평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역사전기비평, 텍스트비평, 신화비평, 마르크스레닌주의비평. 역사전기비평은 작품을 그 작가 삶과 역사를 중심으로 다룬다. 텍스트비평은 오로지 작품만을 본다. 신화비평은 작품 속에 들어있는 신화와 상징을 중심으로 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비평은 작품을 공산주의사회로 나가는 수단으로 다룬다.

언제부턴가 마르크스레닌주의비평은 사라졌다. 평론가들은 자본주의가 옳은 사회가 아니라고 보면서도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껏 공산주의를 외쳤던 나라들이 제대로 된 공산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가서 그럴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문학은 공산주의를 만들려는 수단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면 또 다른 정치질서를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196쪽, 신동엽 산문시1 가운데) 신형철이 이런 시를 만나게 했다.

《인생의 역사》는  책방에서 꾸준히 팔아야지 싶다. 책을 읽기에 어려운 구석도 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세상을 사랑으로 감싼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조금은 벗어나 자유를 꿈꾸게 한다.

글머리에서 요즘 동네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는데, 처음 편의점에서 일을 할 때 두려웠다. 책방에 오는 손님들은 아무래도 생각하는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편의점에 오는 손님들은 술과 담배를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를 무시하거나 힘들게 할 거라 생각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몸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만 살았다. 내 글쓰기도 그런지 모른다.

글쓴이 은종복 씨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제주풀무질'의 일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책과 사회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또밖또북] 코너로 매달 마지막 주에 독자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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