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제주혼듸독립영화제가 끝난 지 한 달이 흘렀다. 프로그램 전반적으로 안정화, 고도화되었다는 자평을 차치하더라도, ‘관객과 혼듸하는 영화 장’으로 기능했다는 자부심이 큰 해였다. 장·단편 독립영화에 매료되어 ‘혼듸영화제 팬’을 자처하는 유료 관객들이 크게 늘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육지 관객들도 종종 눈에 들었다.

무엇보다 20명의 관객심사단(혼듸피플)이 매일 밤 이어지는 심사를 즐기던 장면은, ‘영화를 통해 혼듸 모이자’는 제주혼듸독립영화제의 모토가 그대로 실현된 모습이었다. 혼듸피플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중 올해 ‘프로질문러’로 활약했던 박철홍 혼듸피플이 주목한 두 단편영화를 소개한다. 내년에는 독자들께서도 혼듸의 가족이 되어 즐거운 발걸음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제주혼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

물고기 소년(연출 남동현)
물고기 소년(연출 남동현)

“제주혼듸독립영화제 혼듸경쟁6 섹션”에서 관람한 남동현 감독의 ”물고기 소년”은 어른들이 부재한 시간에 할아버지께서 드실 물을 사기 위해 길을 나선 한 아이의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작은 체구에 왜소하셨지만 옷차림은 항상 단정하셨고 매사 꼼꼼하며 엄격하신 분이셨다.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외출하실 때는 항상 빳빳하게 잘 다림질된 하얀 모시 셔츠와 옅은 노란색으로 된 모시 중절모를 쓰실 만큼 깔끔하셨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나와 형에게 항상 하셨던 말씀이 있다.

“이놈 녀석들! 소제 좀 해라!”

1907년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살아오셨던 할아버지는 일본어를 자주 사용하셨다.

“이놈 녀석들 밥 먹으려면 와리바시 가져와야지. 쓰메끼리 쓰고 제자리에 두지 않고 어디다 두었느냐. 방 소제는 언제 하였느냐.” 등등.(와리바시=젓가락, 쓰메끼리=손톱깎이, 소제=청소)

“소제”가 일본말이었고 “청소”를 뜻한다는 건 고등학교 진학 후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과 방의 상태를 보면 소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형과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야단을 치시는 할아버지를 무서워했고 할아버지께 어린아이 특유의 어리광을 피운 기억이 없다. 할아버지께서 어린 형과 나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하거나 말씀 해주신 기억 또한 없다.

당신의 방을 항상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하신 할아버지에게 펼쳐놓고 어지럽히기만 할 뿐, 정리정돈은 할 줄 모르는 소란스런 남자아이 둘이 예뻐 보였을 리 만무하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와 형을 보았다면 할아버지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잔소리, 야단, 잔소리, 야단, 그리고 이놈 녀석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중풍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누워계시던, 반나절 만에 수척해진 할아버지를 처음 보았을 때 병원 침대를 붙들고 왜 엉엉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

물고기 소년(연출 남동현)
물고기 소년(연출 남동현)

할아버지가 내게 다정하게 해주신 기억도, 그 기억에 따라 오는 애틋함이나 아련함도 없었는데 말이다.

남동현 감독의 “물고기 소년”은 어린 아이가 어느 여름오후 홀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부터 시작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더위에 지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를 열고 마실 물을 찾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집에는 요양 중이신 할아버지의 물만 있을 뿐 아이가 마실 물은 없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물을 다 마셔버린다. 누워계신 할아버지가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조금 있으면 어른들이 오셔서 여느 때처럼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후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오늘 조금 늦으니 아파서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물 잘 챙겨드려야 한다고.

자신이 마셔버려 텅 비어버린 물통을 바라보던 아이는 옆집 할머니에게 찾아가 빈 물통을 내밀었지만 할머니는 다른 것을 채워주신다. 집 근처 편의점도 가보았지만 문이 닫혀 있다. 결국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인근 아파트 단지 마트까지 걸어가 생수 2리터를 산 후 마트를 나선다. 마트에서 군것질의 유혹이 잠시 있었지만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뒷모습과 지난 여름 개울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물고기 잡던 기억을 떠올리곤 흔들리지 않는다.

한낮의 햇볕 아래 자신의 몸통만한 물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는 길가에 서서 물을 조금 마시고 길고양이와 도로 한구석의 잡초에게도 물을 나눠 준다. 그리고 잊지 않고 물통의 뚜껑을 꼭꼭 잠그고 종종 발걸음을 옮긴다. 이 물은 아프신 할아버지께 드려야 하는 소중한 물이기에.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중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유혹과 마주한다.

“축구, 그리고 친구들”

아파트 단지 내 공터에서 학교 친구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고 이내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한다.

아이에게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 노는 것보다 즐거운 것이 무엇이 있을까.

무더위 속에서 뛰어다닌 아이는 물통 속 물을 조금 마셨고 친구들에게도 나눠준다.

그리고 다시 함께 뛰어 노는 사이 친구들은 아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려야 할 물을 다 마셔버린다.

물고기 소년(연출 남동현)
물고기 소년(연출 남동현)

무엇하나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마음을 나눈 아이의 물통은 텅 비었고 뚜껑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해질 무렵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할아버지는 부재하다.

집안을 돌아다니며 할아버지를 찾던 아이는 어둠이 내려온 할아버지 방에서 잠이 들었고 할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할아버지 침대에 기대어 잠든 아이를 안고 아이의 방으로 옮겨 재운다.

그리고 거실 한구석엔 물이 가득 찬 뚜껑 없는 물통이 있고 그 물통 안에는 작은 물고기 한마리가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

아이는 오늘 하루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고 할아버지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거실 한구석에 놓인 물이 가득 찬 물통처럼. 비록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모르지만.

그리고 기억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날 병원침대를 붙잡고 엉엉 울던 나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힘겹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손짓을 해주셨고, 형은 엉엉 우는 내가 창피하다며 중환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날 난 왜 엉엉 울었을까. 난 할아버지의 무엇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박철홍

혼듸독립영화제, 제주여성영화제, 프랑스영화제, 두두영화제 등등 제주도내의 수많은 영화제를 찾아다니며 영화를 보고 영화제 관객심사단도 참여하는 영화 좋아하는 평범한 일반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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