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제주혼듸독립영화제가 끝난 지 한 달이 흘렀다. 프로그램 전반적으로 안정화, 고도화되었다는 자평을 차치하더라도, ‘관객과 혼듸하는 영화 장’으로 기능했다는 자부심이 큰 해였다. 장·단편 독립영화에 매료되어 ‘혼듸영화제 팬’을 자처하는 유료 관객들이 크게 늘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육지 관객들도 종종 눈에 들었다.

무엇보다 20명의 관객심사단(혼듸피플)이 매일 밤 이어지는 심사를 즐기던 장면은, ‘영화를 통해 혼듸 모이자’는 제주혼듸독립영화제의 모토가 그대로 실현된 모습이었다. 혼듸피플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중 올해 ‘프로질문러’로 활약했던 박철홍 혼듸피플이 주목한 두 단편영화를 소개한다. 내년에는 독자들께서도 혼듸의 가족이 되어 즐거운 발걸음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제주혼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

어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영화들은 멈추지 않는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들로 영화를 꽉 채우고 상황을 만들어 영화와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소셜네트워크”, “완벽한 타인”, 그리고 제6회 제주혼듸독립영화제에서 만난 “과화만사성“이 이러한 경우다.

반대로 어떤 영화는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화면들로 이야기를 “보여”준다.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는 간결하고 대신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화면에 보이는 상징들로 장면을 채운다. 마치 한편의 시처럼.

이창동 감독의 “시”나 “버닝” 그리고 지금 이야기할 영화제에서 만난 박소현 감독의 “호수”가 이런 방식으로 이러한 영화이다.

호수(연출 박소현)
호수(연출 박소현)

이 작품에는 단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정현과 호수.

둘은 친구사이이고 둘 다 대학을 휴학 중이다.

태백으로 여행을 간 정현은 친구인 호수의 연락을 받고 호수를 만나러 서울로 돌아간다.

호수는 대학 휴학 후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대중 목욕탕을 대신 운영 중이다.

호수네 목욕탕에 도착 후 목욕탕 청소와 영업 준비를 함께 돕던 정현에게 호수는 묻는다.

“태백엔 무슨 일로 갔어?”

정현은 말한다.

태백을 간 이유는 한강의 수원지(水源地)인 검룡소를 보기 위해서 라고. 하지만 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정현은 반대로 묻는다.

“넌 여기에 계속 있을 거야? 너 목욕탕 물려받기 싫어했잖아”

호수는 말한다.

“잘 모르겠어, 그리고 그냥 목욕탕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라고.

둘은 서로의 대답에 다시 묻지 않는다. 둘 사이에 왜? 라는 질문은 없다.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몇마디 나누고 지금 해야 할 일인 목욕탕 청소를 말없이 할 뿐이다.

둘은 서로의 생각을 되묻고 삶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 그저 그런 관계인걸까?

아니면 아직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본인이 어떻게 살아갈 방향과 길을 찾지 못해 서로 말하지 못한 것일까.

영화는 더 이상 둘에게 묻지 않고 그들과 목욕탕을 관객에게 비출 뿐이다.

인물은 거울에 반사시키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대신 목욕탕 수면을 들여다볼 뿐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날 들여다보는 것처럼.

호수(연출 박소현)
호수(연출 박소현)

몇달 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들 보기엔 그럴듯한 직장을 10년째 다니고 있고 결혼 후 아이가 둘이며 얼마 전 아파트도 장만한 그 친구는 말했다.

“퇴사하고 싶다. 정 안되면 휴직이라도 하고 싶고”

무슨 일 있냐는 내 질문에 친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자신이 직장 내에서 섬처럼 존재한다고 말했다.

“섬?”

“응.. 섬”

“섬이란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이야?“

친구는 말했다.

부서 내 사람들과 함께 한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10년째 겉돌고 있다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부서 직원들이 서울소재 대학 출신인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은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다고.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고 단단해질 줄 알았지만 단단해지기는커녕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전 친구가 그 직장으로 이직을 고민할 때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좋은 기회네. 만약 해보고 안되면 그 경력으로 전 직장으로 갈 수 있잖아. 도전해봐!“ 라고 내가 말했고 함께 있던 다른 친구는“비교 당할게 많을텐데 괜찮겠냐? 그리고 거기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잖아. 괜찮을까. 무리하는 거 아닐까? 너의 수준보다 너무 높은 곳을, 욕심 부리는거 아냐?“ 라고 말했다. 친구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 이야기였고 결국 이직을 했다.

그리고 지금 휴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친구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언지 직감했다.

하지만 난 친구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해버렸다.

“너 그만두면 아파트 대출은 어떻게 할꺼냐. 애들도 한참 커가는데 너무 나약해진 거 아냐?. 김사장님(친구 배우자에 대한 별칭)께서 동의 하겠냐. 네 말 듣자마자 정신 차리라고 하시겠지. 그 전에 내가 먼저 해줄게. 힘내 힘. 그리고 정신차려 정신. ”

내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친구는 알겠다고 하곤 주식과 골프 이야기를 조금 하곤 통화를 마무리 했다.

통화가 끝나고 ‘내가 잘한걸까. 아냐. 괜히 김사장님(친구의 배우자)께 이야기 꺼냈다가 욕먹을 바에야 내가 하는게 낫지. 미리 예방주사를 놔줬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순 없었다.

‘아, 이녀석 지난번에 우울증 약도 먹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길 바랬고 다행히 아무일도 없었다.(휴직도)

정현과 호수 둘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대화를 다시 이어가지 않고 묵묵히 목욕탕 청소를 하고 깨끗한 물을 채우곤 함께 물속에 들어가서 말없이 물속을 바라볼 뿐이다.

태백에서 시작한 물은 한강이 되었고 서울에 도착해 호수네 목욕탕에 고였다.

그 물이 다시 흐를지 그곳에 고여 있을지는 아직 둘 다 모른다.

그리고 굳이 물을 헤집어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물속에 들어가 가만히 들여다 볼 뿐이다.

호수(연출 박소현)
호수(연출 박소현)

물의 깊이가 얕고 고여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가벼운 것도 아니며 포기한 것 또한 아니다.

물은 계속 흔들리고 움직인다. 그것이 눈에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뿐.

정현과 호수는 서로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고 그래서 말없이 물속에 함께 앉아 있었다.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살아가고 나아갈지 모르지만 그것은 오롯이 스스로의 결정이고 서로의 삶이라는 걸 알기에.

휴직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친구는 최근 달리기에 빠져 매일 10km씩 뛰고 있다. 그리고 곧 있을 마라톤 대회에서 10km를 1시간 안에 완주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며 1시간 안에 완주하면 맥주 한캔을 사달라고 했다.

난 알겠다고 하며 마라톤 끝나면 같이 맥주 한캔 마신 후 치킨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친구는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치킨 말고 뭉친 근육 풀러 같이 목욕탕 가자고.

잠시 고민하던 난 그러자고 했고 친구는 달리기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목욕탕 나와서 마실 우유는 바나나 우유가 나을지 딸기 우유가 나을지.

그리고 다짐했다. 그날 친구와 치킨은 꼭 먹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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