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에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했던 시절. 헤비메탈 음악이 권좌에서 밀려나며 락음악 씬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나는 방에 틀어 박혀 작곡에 몰두하고 있었다. 잘 알 순 없었지만 무언가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카피밴드는 의미가 없었다. 오리지널 곡을 써야만 했다.


당시 내가 연주하던 스래쉬메탈 Thrash Metal은 각 악기마다의  테크닉이 상당해 웬만한 실력으론 연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곡을 쓴다는 건 더욱 고난도의 일이었다. 그에 비해  너바나의 곡들은 초보자들도 거뜬히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쉬웠다. 코드는 간단했지만 사운드는 헤비하고 파격적이었으며 특히 거침 없이 속내를 드러내는 가사는 그 사운드와 아주 잘 어울렸다.

때는 세기 말이었고 음울한 멜로디와 자기파괴적인 음악들이 등장했다.
라디오 헤드는 'Creep'에서 '넌 천사처럼 아름답고 특별하지만 난 머저리 꼴통이야'라고 외쳤고 벡은 'I’m a Loser Baby, So Why Don’t You Kill Me!'라며 자조섞인 랩을 뱉었다.

나 역시 '썩은 시궁창 속의 쥐처럼 살고 싶어“라는 멋진(?) 가사가 담긴 곡을 완성해 냈다. 문제는 편곡 능력이 없다는 것. 어느 날,  친구 녀석이 서울에서 낡은 4트랙 레코더를 구해 왔다. 문제는 누구도 그 기계의 사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서로 모여 밤을 새며 녹음을 시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나의 첫 녹음은 실패 할 수밖에 없었다. 밴드와 합주하며 곡을 완성하긴 했지만 머릿 속에서 생각했던 음악과는 많이 달랐다.

연주 실력보다는 작곡 실력이 중요했고 무엇보다 밴드 음악은 편곡이 중요했다. 결국 팀은 와해됐고 우린 심한 절망감을 맛봐야 했다. 가끔 생각한다. 그 레코더의  작동법을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미디 프로그램과 디지털 레코딩 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머릿속 음악들을 펼쳐 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나처럼 평범 보다도 떨어지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겐 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예전처럼 밴드가 모여 잼을 하며 곡 작업을 했던 시대는 저물어 간다. 이젠 혼자서도 충분히 데모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상의 악기로 곡의 뼈대를 설계 한 후 수정/보완을 거치면 좀 더 정교한 편곡이 가능해졌다. 물론 하루 종일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반복해서 듣다보면 정신은 피폐해지고 육체 에너지는 고갈된다.
좀 더 좋은 톤과 매끄러운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악기들을 매만지는 믹싱작업은 특히나 더 그렇다.

그런 힘든 작업 후에는 명상을 하기도 하고 독주 연주를 들으며 귀를 정화하기도 한다. 오롯이 하나의 악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엠비언트와 레이어로 겹겹이 쌓인 사운드 말고 허한 여백의 공간이 느껴지는 음악들 말이다. 그 빈 공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오래 들어도 귀가 편안하다.
솔로  연주는 기타와  피아노 등의 하모니 악기 연주자들이 자주 시도하는 연주 컨셉이다.
물론 다른 악기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리듬과 멜로디를  펼치는 것은 상당한 경지의 내공이 필요하다. (어느 악기든 독주가 가능한 실력이면 머릿속에 드럼과 베이스는 기본적으로 내장돼 있다고 보면 된다.) 악보 없이도 즉흥적으로 하모니를 진행하고 그에 맞춰 순간적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이다.

최근엔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Fred Hersch의 음반을 듣는다.
그는 이미 여러 장의 솔로 음반을 낸 거장이다. 독창적이고 이지적인 멜로디를 구사하며 서정적이면서도 차가운 느낌의 연주가 특징이다. 트리오 구성에선 역동적이고 폭발적인 연주를 들려주면서도 긴장과 이완을 탁월하게 조절한다.

2020년 Covid-19 시국에 발표한 음반 <songs from home>은 이전 연주와는 달리 평화롭고 따스한 선율로 가득하다. 거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하는 듯 꾸밈이 없는 편안한 연주다.

첫 곡 'Wouldn’t It Be Loverly'부터 느껴지는 사운드는 그의 연주라고 생각 못할 만큼 담백하다.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멜로디와 산뜻한 왼손 컴핑이 무척이나 조화롭다.


이어지는 'Whichita Lineman'은 좀 더 선명한 멜로디에 부드러운 터치의 연주를 들려주며
'After You’ve Gone'은 독특한 스윙리듬 위의 깔끔한 타건과 솔리드한 타임필이 인상적이다.
팝적인 익숙한 멜로디를 띈 'West Virginia Rose'에 이어지는 접속곡은 'The Water is Wide'이다. 스코틀랜드의 민요인 'O Wlay, Waly'가 원곡인 이 곡은 칼라 보토프의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민요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는 청명한 피아노 소리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주 멜로디가 끝나고 이어지는 즉흥연주는 코드를 리하모니제이션한 듯 들리는데 그로 인해 선율이 더욱 더 입체적으로 들린다.


듀크 엘링턴이 작곡한 '(In My) Solitude'에선 프레드의 전매특허인 투명한 리리시즘과 명징한 선율들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When I’m Sixty Four'는 프레드에겐 정말이지 이색적인 선곡이 아닐 수 없다. 비틀즈의  67년도 명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수록된 이 곡은 이십대의 폴 메카트니가 60대의 자신을 상상하며 쓴 곡이다.(녹음 당시 프레디의 나이가 64세 였다고 하니 이해가 되는 선곡이긴 하다) 비틀즈의 유머러스하고 앙증맞은 이 노래를 그만의 스타일로 피아노 위에 색다르게 그려낸다. 마치 랙타임 피아노를 듣는 듯 흥겨운 리듬과 다양한 프레이즈로 생동감 있는 연주를 들려주며 앨범은 마무리 된다.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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