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주민투표제도는 주민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 주민투표법 상 주민투표는 주민·지방의회·지방자치단체가 주민투표 실시를 청구할 경우 절차를 거쳐 실시된다.

그러나 해당 사안이 국가의 권한 또는 사무에 속하는 사항일 경우에는 중앙정부 부처의 장에게 달려 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는 경우, 주민들은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 국가 관할 사업이라는 이유로 국책사업에 대해 주민들이 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잃는 셈이다. 현행 주민투표제도의 맹점이다. 이에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아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직접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민간주도형 주민투표라 일컫는다.

국책사업을 대상으로 민간에서 주도한 주민투표는 법적 효력이 있을까. 답은 ‘가질 수 없다’이다. 현재 민간주도 주민투표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그러나 주민투표는 사안에 대한 주민들의 뜻을 확인하는 가장 강력한 의사표현 방식으로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민들이 자기결정권 행사를 위해 자발적으로 추진한 민간주도 주민투표 사례들을 알아보았다.

핵폐기장 백지화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촉구하는 부안군민들. (사진=환경운동연합 제공)
핵폐기장 백지화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촉구하는 부안군민들. (사진=환경운동연합 제공)

전북 부안, 주민투표로 핵폐기장 건설 막다

국내 첫 민간주도 주민투표는 전북 부안군에서 이뤄졌다. 2003년 당시 정부는 3000억원의 보상금 지급을 약속하며 핵폐기장 건설 예정지를 공모했다. 같은 해 7월 부안군수가 주민과의 논의 과정 없이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했고, 주민들은 곧바로 저항했다. 

부안군 주민들은 부안핵폐기장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사회, 종교계, 학계 인사들과 함께 ‘주민투표관리위원회’(이하 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관리위원회는 13차례의 읍·면별 토론회와 2차례의 군합동토론회를 실시했다. 

투표 당일 투표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6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였고, 부안 지역 개인택시 기사 128명은 투표소까지 향하는 주민들의 이동을 무료로 도왔다. 37개의 각 투표소에는 변호사가 1명씩 배치돼 투표관리업무를 총괄 지휘·점검했고, 자원봉사자 10여 명이 투표 실무와 참관 업무를 담당했다. 

하승수 시민자치정책센터 운영위원이 2004년 발표한 ‘부안 주민투표의 경과와 의의, 향후 발전방향’에 따르면 부안군 주민투표 비용으로는 5000만원이 소요됐다. 관리위원회는 투표용지, 투표안내문, 각종 공고문, 홍보자료 인쇄비 등에 드는 비용을 모두 시민 모금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2004년 2월 14일 헌정사상 최초의 민간주도 주민투표가 부안에서 실시될 수 있었다. 유권자의 72.04%(3만7540명)가 투표에 참여했고, 투표자의 91.8%(3만4472명)가 핵폐기장 유치에 반대했다. 

그 결과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핵폐기장 건설계획은 중단됐다. 2004년 9월 16일 산업자원부가 부안군 부지 선정 절차 포기에 들어갔고, 동년 11월 부안 핵폐기장 건립은 백지화됐다. 

기장 해수담수 공급에 대한 주민투표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기장군 주민들. (사진=환경운동연합 제공)
기장 해수담수 공급에 대한 주민투표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기장군 주민들. (사진=환경운동연합 제공)

'물'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킨 부산시 기장군 

부산시 기장군에는 고리핵발전소가 있다. 고리핵발전소 근처에 거주하는 ‘균도네 가족’은 2012년 7월 한국수력원자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네 명의 가족 중 3명이 암환자였다. 기장에서 태어난 아이 균도는 발달장애가 있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다음 해에 진행된 균도네 가족의 소송은 기장군 주민들의 큰 이슈였다. 균도네 가족이 한수원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던 2014년, 부산시는 기장해수담수화 시설(부산기장해양정수센터)을 완공해 바닷물을 수돗물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해수담수화를 위해 물을 끌어오는 취수장은 고리 핵발전소에서 불과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또 부산기장해양정수센터는 2014년 8월 준공 직후, 취수구에 원전에 가까운 삼중수소(3H) 같은 방사성 물질이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몇 차례 토론회에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주민들은 물의 문제는 자신들이 직접 결정해야 할 일이라며 주민투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부산시는 해수담수화는 국책사업으로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이에 주민들은 ‘기장해수담수 공급찬반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결성했다. 

시민단체 활동가와 주민들로 구성된 관리위원회는 주민투표에 드는 2억원 가량의 비용을 모금으로 충당키로 했다. 2016년 3월 19일과 20일, 이틀간 주민투표가 이뤄졌고 유권자 26.7%(1만60414명)가 투표, 반대 89.2%(1만4308명)라는 결과가 나왔다. 

부안 핵폐기장 주민투표와 마찬가지로 기장군의 주민투표도 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하지만 법원이 2017년 기장군 주민들의 주민투표 요구가 정당하고 판결 내려 부산시는 상고를 포기하고 사실상 공급 계획을 중단했다. 

이로써 부산시에서 2000억원을 들여 완공된 해수담수화 시설은 2023년까지 정상 가동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노진철 교수(경북대 사회학과)는 “주민들은 자신의 삶과 지역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앗아가는 중심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민간주도형 주민투표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간주도형 주민투표는 특정한 주제와 관련하여 찬성자와 반대자의 비중을 단순히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가 왜 항의하는지 그 이유를 정치체계가 식별하도록 요구”하며 “대통령의 관심이나 집권여당의 선거공약이 국책사업의 형식을 빌려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허용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