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초 교사 추모 분항소에 걸린 문구.
서이초 교사 추모 분항소에 걸린 문구.

서이초 교사의 비극으로부터

서이초등학교 교사 비극을 보며 ‘두 명의 아이’를 떠올렸다.

먼저 ‘남겨진 아이’가 있다. 담임 교사를 떠나보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들을 수 없다. 아이는 오늘도 서둘러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묻힌 아이’가 있다. 태어났지만 세상은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아이는 내일의 빛을 한 줌도 누리지 못하고 친부모에 의해 땅밑에 잠겼다.

아이들은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도 아이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남겨진 아이와 묻힌 아이 모두 교사를 만날 수 없다. 교사와 아이들의 인연을 끔찍하게 잘라버린 ‘외부의 힘’은 무엇인가.

언론 등 공론장은 ‘부모’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교사에게 쉴새 없이 악성 민원을 제기한 부모.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갓 태어난 아이를 유기한 부모.

부모들을 향한 비난이 들불처럼 번지지만, 이를 잠재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도 나오지 않는다. 뜬금없는 판단이 더 큰 불을 키우고 있다. 교권 침해의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지목됐다.

학생인권조례를 강화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학부모들에게 교권 침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악성 민원을 제기한 부모만을 끄집어내 처벌할 수도 없다. 권력은 사람 대신 비난의 화살을 감당할 무생물 원인이 필요했다. 학교 현장에 공통으로 적용되고, 정치적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제도적 원인을 찾았다. 그 결과가 ‘학생인권조례’다.

학생인권조례 논란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권’이란 무엇인가? 합의된 개념이 있는가?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에서도 교권의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교권은 사실상 ‘상상의 개념’으로 존재한다. 정치적 자리에 따라 다르게 규정한다. 교권을 ‘학생을 권위적으로 지배하는 힘’으로 인식하면, 교권의 최종 목표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가 된다. 이 관점이라면 교사에 저항하는 아이들을 처벌할 수 없는 학생인권조례는 개정되거나 사라져야 한다.

2020년 09월 23일 제주도의회 앞에서 정당과 시민사회 단체 등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촉구하는 모습.(사진=조수진 기자)
2020년 09월 23일 제주도의회 앞에서 정당과 시민사회 단체 등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촉구하는 모습.(사진=조수진 기자)

조례를 무너뜨렸을 때 구시대에 떠돌던 교권의 유령을 소환할 수 있겠지만, 비극은 더 큰 비극을 부를 것이다. 권위는 강제적 통치 구조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적 소통과 합의에서 만들어진다.

조례를 부정하는 순간, 더 이상 학생들은 민주시민이 아니다. 교권을 침해할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된다. ‘범죄 VS 처벌’의 긴장이 가득한 교실. 이 곳에서 교권이 평화롭게 보호될 수 있는가? 해결의 방향은 반대여야 한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조례를 더 강화해야 한다.

교권을 ‘안전하게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로 단순히 정의해도 마찬가지다. 이를 실현하려면 교사에게 안전한 삶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안전한 삶이 ‘인권’이다. 교권 보호를 위해 결단해야 할 것은 학생인권조례 범위를 교사와 교직원, 교육공무직 등 교육 주체까지 넓혀 더욱 진전된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핵심은 민주주의의 회복

학생인권조례 논란은 한국 교육의 근본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남겨진 아이와 묻힌 아이, 교사의 인연을 끊은 결정적인 외부의 힘, ‘양극화’다.

양극화는 헌법이 규정한 ‘의무교육’의 토대마저 위태롭게 한다. 의무교육이 펼쳐지는 초등학교 과정은 어느새 부모의 권력과 자본이 아이들에게 세습되는 과정이 되고 있다. 부모가 어린 후계자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면 교사의 역할은 간명해진다. 부모의 목표를 그대로 수용, 이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왜곡된 인식에 사로잡히면 더 이상 교사와 동등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교사는 부모가 자신의 세금으로 고용한, 우리 아이를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하는 종속적 대상이 된다.

교사의 비극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묻힌 아이’다. 아이는 의무교육을 향한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묻힌 아이는 양극화가 낳은 가장 슬픈 모순이다.

치열한 공론장에서 정작 중요한 아이들의 문제, 특히 묻힌 아이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교사의 비극은 양극화의 비극이다. 비극을 기억하며 교육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격차가 벌어질수록 아이들의 삶만큼은 동등하게 존중받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교실을 만들어야 한다.

교사와 부모는 감정적으로 대립하거나 갈등할 관계가 아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아이 한 명을 위해 굳건히 연대해야 할 관계다. 비극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결국 민주주의의 회복이다.<이정원 제주한라대 교수·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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