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과 10일 사이 이스라엘 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에 위치한 리말(Rimal) 지역을 촬영한 위성 사진.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이다. 위는 공습 전 사진, 아래는 공습 후 사진. (사진출처=BBC)
지난 9일과 10일 사이 이스라엘 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에 위치한 리말(Rimal) 지역을 촬영한 위성 사진.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이다. 위는 공습 전 사진, 아래는 공습 후 사진. (사진출처=BBC)

 

극단적 비대칭 희생의 의미

6,407명 대 308명.

2008년 이래 최근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희생자의 누적 숫자다. 4차례 충돌 모두 20:1 수준의 희생자를 내었다. 가내수공업적 무기를 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세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맞붙었기에 20:1의 희생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지난 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를 향해 수천 발의 로켓을 발사했다. 그러자 곧바로 이스라엘은 피의 보복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보복 공격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에는 단순히 ‘진압’이라 했었는데 이번에는 ‘전쟁’이라 명명했다. 희생의 규모가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렇게 무모한(?) 공격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본디 그 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그곳에 들어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무력으로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지금은 원주민에게 15%의 땅만이 남아 있다. 그게 바로 가자 지구, 서안 지구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이스라엘의 극심한 통제와 봉쇄, 탄압 속에 놓여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 극우 정당은 ‘아랍계 완전 추방’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살아도 살아있는 삶이 아니다.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자는 게 보편 정서가 되었다. 무모하게만 보이는 그들의 반복된 저항은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 

(사진출처=BBC)
지난 10일과 11일 사이 이스라엘 방위군이 폭격했다고 밝힌 가자지구 한 이슬람 대학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위성사진. (사진출처=BBC)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지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뉴스는 모두 이스라엘 편향이다. 이스라엘은 선(善), 팔레스타인은 악(惡)이다. 물론 공격을 시작한 건 팔레스타인이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이 포함되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근원적 아픔을 조명하지 않는 보도 태도에 마음이 불편할 뿐이다. 

불편한 건 또 있다. 전쟁 그 자체다. 전쟁은 인명 살상을 전제로 한다. 그에 따라 군인은 합법적 살인 기계가 된다. 살인의 합법화라니, 끔찍한 일이다. 스스로 사람됨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전쟁에서 죽임을 당해도 단지 도구 하나의 망실로 처리될 뿐이다. ‘훈장’이라는 거짓 장식물이 본질 은폐를 위해 동원된다. 여기에 생명은 없다. 인권은 없다. 그러니 죽어가는 군인들만 불쌍한 일이다. 

현실을 무시한 몽환적 헛소리인가? 좋다. 군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민간인 희생은 뭐라 합리화할 것인가? 역사 속의 거의 모든 전쟁은 민간인 희생을 피하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77%가 민간인 희생이었다. 이건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다. 

그런데도 전쟁은 항상 성스러운 이름으로 미화된다. 온갖 명분이 동원된다. 여기서 죽어 나가는 건 군인들과 민간인들일 뿐.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자는 안전하다. 아니 오히려 전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챙긴다. 

화가 나는 건 그 때문이다. 시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점. 패권국은 주변국 국민의 생명을 우선하지 않는다는 점. ‘애국’이니 ‘안보’니 ‘동맹’이니 하는 수사는 패권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동원될 뿐이라는 점 말이다.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 자본주의는 언제나 활로를 전쟁에서 찾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그렇게 활용되는 면이 강하다. 

불길한 건 최근 동북아 정세 역시 그리 안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중국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그를 위해 동북아에서 군사적 패권을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 한반도가 그리고 제주도가 미국의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평안을, 제주도민의 안전을 우선하지 않는다. 미국 자본의 이익이 첫 번째일 뿐이다.

지난 2017년 3월 강정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미 해군 이지스함 '스테뎀함' (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지난 2017년 3월 강정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미 해군 이지스함 '스테뎀함' (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지난 3일 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주민회, 강정평화네트워크, 비무장평화의섬제주를만드는사람들, 미 이지스 구축함 랄프 존슨의 즉각 출항과 제주해군기지 폐쇄를 요구하는 사람들 등이 강정해군기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지난 3일 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주민회, 강정평화네트워크, 비무장평화의섬제주를만드는사람들, 미 이지스 구축함 랄프 존슨의 즉각 출항과 제주해군기지 폐쇄를 요구하는 사람들 등이 강정해군기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강정평화네트워크 제공)

 

힘에 의한 평화

지난 2일, 미 이지스 구축함 랄프 존슨 (DDG-114)이 제주해군기지에 입항했었다. 뜬금없이 제주에 온 것은 물론 아니다. 9월 4일에 필리핀과 합동 해상 훈련을 벌였고, 9월 9일에는 대만 해협을 통과했다.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남중국해와 대만은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 자칫 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이게 남의 일일까? 아니다. 제주해군기지는 곧바로 대중국 전쟁을 위해 활용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의 한복판으로 쓸려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명확히 할 게 있다.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관련 기사에 “북한으로 가라”라는 댓글을 달아 놓은 걸 보았다. 지금도 이렇게 무지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으로 놀랍다. 제주해군기지는 북한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제주해군기지가 북한이 아니라 중국 견제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건 상식 아닌가. 

이런 자들과 논쟁할 여유는 없다. 논쟁은 현실론자들과 하고 싶다. 현실론자들은 말한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했으니, 그들과 동맹을 맺어야 안전이 보장된다고. ‘힘에 의한 평화’가 실질적 평화다, 라고. 

인정한다. 실제 미국과 맞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미국과 동맹을 맺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 러시아와 척질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의 실리를 포기할 필요도 없다. 맹목적 미국 숭배가 아니라 실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전 세계 평화 애호자들과 연대하여 궁극에는 전쟁 그리고 전쟁 연습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웅진 도독부’부터 ‘주한미군’까지, 남의 나라 군대가 우리 땅에 주둔하는 시대는 결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다.

또 하나, ‘힘에 의한 평화’ 문제다. 과연 힘으로 평화가 지속될까? 나는 회의적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힘의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20:1의 희생을 반복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계속해서 저항한다. 가내수공업적으로 만든 로켓탄을 가지고서라도 말이다.  

이처럼 ‘힘’은 갈등과 분쟁만을 더욱 키워왔다. 힘에 의한 평정과 평온은 일시적이다. 이해와 배려와 대화와 타협이 없는 평화는 지속될 수 없다. 결국 ‘힘에 의한 평화’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는 그마저도 ‘남의’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던가. 그 ‘남’은 결코 우리의 안전부터 챙기지 않는다. 바로 그 ‘남’의 이익이 우선이 된다는 건 상식이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며 폭파되기 전의 구럼비.(사진=조성봉, 강정해군기지반대대책위 제공)
해군기지가 들어서며 폭파되기 전의 구럼비.(사진=조성봉, 강정해군기지반대대책위 제공)

벽에 대고 욕이라도

너무도 오랜만에 강정 마을 앞을 지나갔다. 구럼비 바위가 아니라 해군기지가 있었다. 낯설지 않다.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일상이 된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일상이 되었다고 문제의식마저 흐려져 있다는 거. 오가는 남의 나라 이지스함을 보면서도 ‘그게 현실이다’라며 쳐다만 보고 있는 거. ‘전쟁 위기’를 떠올리는 건 불편하다. 외면해도 일상은 잘만 돌아간다. 그러면서 안온한 현실은 불감을 생활화한다. 그리고 평화는 추상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날도 사람들은 싸우고 있었다. 소리치고 있었다. 돌아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벽에 대고 욕이라도”라는 말을 생각했다. 

강정의 그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2022년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