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제주에 내려온 통위부 고문관들. 오른쪽부터 박진경 11연대장, 김종면 중령, 로버츠 준장, 최갑종 소령, 백선진 소령, 임부택 대위(1948. 5) 4.3 진상조사보고서
제주에 내려온 통위부 고문관들. 오른쪽부터 박진경 11연대장, 김종면 중령, 로버츠 준장, 최갑종 소령, 백선진 소령, 임부택 대위(1948. 5) 4.3 진상조사보고서

“제주도민 30만을 희생해도 무방하다.”

일본군 출신 박진경 국방경비대 연대장이 말했다. 사석에서 한 발언이 아니다. 연대장 취임사로 한 발언이다. 1948년 5월의 일이다. 실제 그는 4·3 당시 무차별 체포작전을 펼쳤다. 그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박진경의 발언은 2003년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확인된다. 손선호 하사의 증언과 김익렬 장군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에도 담겼다. 뿐만 아니라 박진경의 참모였던 임부택 대위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알본군 소위 출신 박진경...국방경비대로 '변신'하다

1920년에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친일파 집단의 주요간부였다. 살림이 넉넉했다. 박진경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 외국어학교, 일본 육군공병학교를 졸업 후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한 뒤 부산에서 국방경비대 제5연대가 창설할 때 입대했다. 그렇게 일본군 군복을 벗고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군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1946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8년 5월 6일, 박진경 중령은 제주도 주둔 제9연대장에 취임했다. 평화로운 해법을 모색하던 전임 김익렬 연대장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사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이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된 군인과 서북청년단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명약관화다. 이후, 약 한달 동안 수천 명의 민간인을 붙잡아들였다. 그 수가 6000명에 달한다.(조선일보, 1948년 6월 12일) 무장대 토벌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성, 노인 할 것 없이 붙잡아들였다. 제주도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한국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박진경의 강경진압을 성과로 쳤다. 박진경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영어를 잘해 미군정의 신임이 두터웠다. 제주도민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진압을 높게 평가한 미군정은 박진경을 대령으로 진급시킨다. 연대장 취임 1개월 만이다. 하지만 국방경비대 내부에서는 동포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박진경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경비대 군인 41명이 집단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주로 제주 출신이었다. 이후 진압작전은 더욱 강화된다.

취임 후 40여일 뒤인 6월 17일 박진경의 대령 승진 축하 파티가 열렸다. 파티 후 숙소에서 잠든 박진경은 다음 날 새벽 총에 맞아 죽었다. 박진경 암살에는 9명의 군인이 가담했다. 문상길 중위가 계획을 주도했고, 손선호 하사가 직접 방아쇠를 당겼다.

박진경 암살에 가담한 청년 군인들은 박진경이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며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하고 있다고 봤다. 문상길은 재판 최후진술에서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2년 11년 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망월산이 보이는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22년 11년 26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인근 망월산이 보이는 공터에서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문상길의 최후진술은 힘이 셌다. 문상길 등의 사형판결이 부당하며 취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반일논조가 강했던 조선중앙일보에 다음과 같이 박진경을 평가하는 논평이 게재되었다.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5.10선거를 반대하고 봉기한 제주도민의 위대한 애국성을 박대령은 학살과 고문과 총검으로써 전 도민을 소탕하려한 것이다. 이는 박대령이 제2차 대전중 간도(强盜) 일제에 자진 학병으로 나가 충성을 다하였던 자이며 해방 후는 그들의 새로운 주인(미군정을 말한다)에게 그 충성을 드리는데 전 도민의 무차별 학살로써 진충(盡忠)하였으며 그를 계속하려 하였다.”

논평은 이어 문상길 등에 대한 사형 판결 취소를 촉구했다. “이에 분연하고 동족살상을 묵과할 수 없는 민족정기에서 문중위 등 제씨는 박대령을 살해한 것이다. 이런 애국애족열에 불타는 의거를 불구하고 사형판결이라는 그 부당성을 재일60만을 대표하여 지적하고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1948년 9월 1일)”

민간인 학살...불멸의 공훈인가, 불멸의 악행인가?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묻혔다.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박진경은 창군 영웅 취급을 받는다. 1952년 11월 7일 추도비가 제주도에 세워진다. 당시 제주신보는 ‘불멸의 공훈을 추념’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박진경 추도비 제막식을 알렸다. 6.25 한복판에서 한국군의 사기 진작과 ‘창군 신화’를 위해 박진경을 창군 영웅으로 끌어올려졌다. 박진경은 1968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다. 1990년에는 그의 출생지인 남해군에 동상까지 세워졌다. 동포 30만명을 희생해도 무방하다고 말하며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강경 진압 작적을 펼친 박진경 영웅화에 제주지역 시민사회는 한탄하고 있다.

2021년 9월 18일 도외 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동부팀이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앵강고개에 조성된 남해군민동산 내 박진경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21년 9월 18일 도외 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동부팀이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앵강고개에 조성된 남해군민동산 내 박진경 동상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의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의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제주지역 시민사회는 박진경 추도비를 철거하자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하지만 철거되지 않았다. 박진경 추도비를 관리하는 주체 노릇을 하고 있는 보훈청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잘못 태어난 비석이 끝까지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다. 제주시민사회는 죽어서도 철창 안에서 도민 학살 죗값을 치루라는 의미를 담아 박진경 추도비에 철창 형태의 조형물을 둘러쳤다. 보훈청은 박진경 추도비가 아니라 시민들이 둘러친 철창을 철거했다. 앞으로도 박진경 추도비로 인한 갈등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해법은 없을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박진경 ‘단죄비’를 세울 것을 제안한 바 있다. 현재의 박진경 추도비를 4·3평화공원 한쪽 구석에라도 옮겨두어 잘못된 역사(그릇된 창군 영웅화)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그의 잘못된 행적을 제대로 기록한 ‘단죄비’도 세워서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작업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고 한껏 추켜올려진 박진경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해도 무방하다”며 저질렀던 '불멸의 악행'도 명명백백하게 알리고 전해야 한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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