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1948년 8월 19일~24일 일일보고서(제주4·3아카이브)
1948년 8월 19일~24일 일일보고서(제주4·3아카이브)

1948년 8월 23일. 국방경비대 9연대의 순찰대가 이동 중 홍로(서귀포 동·서홍동 지역의 옛이름이다)에 있는 경찰지서에 접근하자 경찰이 멈추라고 명령했다. 경비대 장교는 “우리는 국방경비대원이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경찰은 ‘너희는 적일 수도 있다’면서 순찰대를 향해 총을 쐈다. 총알 한 발이 순찰대원 한 명의 셔츠를 스쳐지나갔다.

경비대 순찰대원들이 당장 응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담당 장교는 사격을 제지했다. 유혈 충돌을 피한 뒤 순찰대는 경찰을 모두 체포했다. 경찰 간부가 온 뒤 억류했던 경찰들을 풀어주었다.  경찰들과 헤어지면서 “친구처럼 악수를 나눴다”면서도, 부러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경비대 9연대의 활동 내용이 담긴 일일보고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단순한 사건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사건을 통해 군과 경찰의 서로에 대한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상황을 보면 상호간에 얼마간의 적대감이 드러난다. 경비대 대원이 경찰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긴 했지만, 우애를 담은 악수라고는 확신하지 못한다. 경찰에 대한 군의 불신이 엿보인다. 보고자료에 이처럼 쓴 것은 경비대 한 개인만이 아니라 군 전반에 팽배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해방 이후 제주 경찰을 바라보는 군의 심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경찰에 대한 불신은 사회에 만연했다. 군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민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친일 경찰들이 자리를 유지하는데 대해 분노했다. 그러다 1947년 3·1절 집회에서 경찰이 민간인을 상대로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민은 경찰에 대한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습격한 주요 대상 역시 경찰지서와 우익 청년단체 요인들의 집이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4월 3일, 무장봉기 당시 군은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일제 당시 체제를 유지한 경찰과 달리 군은 1948년 8월 15일에야 창설된다. 1946년 미군정 아래 편성된 국방경비대를 모체로 한다. 4·3무장봉기 직후, 미군정과 경비대는 4·3 무장봉기가 일어난 뒤에도 경찰이 담당해야 할 치안 문제로 판단했다. 추후, 군과 경찰 및 우익 청년단이 가세해 무장대토벌과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지만 군 측에서는 살짝 뒤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5·10 남한단독선거가 무사히 치러져야 했고, 창설을 앞둔 군의 첫 작전이 동족을 겨냥한 작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있었다.

4·3 무장봉기 이후, 사태가 심화됨에 따라 미군정은 군을 개입시키기로 한다. 경비대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17일, 미군정으로부터 진압작전 참여 명령을 받는다. 김익렬은 귀순을 우선토록 하는 선무작전을 펼쳤다. 본격 진압 작전을 펼치기 전에 심리적 동요를 유발하면서 귀순을 유도해 인명살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김익렬은 평화협상도 시도했다. 본인 명의로 협상을 요구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한라산에 살포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진의가 받아들여졌다. 무장대와의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 김익렬은 유서를 쓰고 협상장으로 나갔다. 4월 28일 김익렬은 홀로 무장대 총책 김달삼을 만났다. 무장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하산하며, 경비대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협상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협상 3일 뒤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오라리 민가에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김익렬이 조사 후 우익 청년단체가 저지른 일이라고 미군정에 보고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장대에 의한 방화라는 경찰의 보고를 채택한 것이다. 김익렬은 조사를 이어가, 오라리 주민들이 방화 주동자로 지목한 우익 청년단원 박모씨를 검거해 구금했다.

오라리방화사건 이틀 뒤 5월 3일, 평화협정에 따라 산에서 내려오던 이들이 총격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을 잡고 취조한 결과 무장대의 귀순을 방해하는 임무로 투입된 경찰 특공대였다. 경비대와 무장대가 평화협정대로 사태를 종식시키는 것을 훼방하려 든 것이다. 막대한 인명피해 없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가만히 두지 않았다.

김익렬은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동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두 사건을 빌미로 미군은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는 미군정의 개입이 있었다.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무력진압 방침에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평화협정 결렬을 위한 작전에 미군정이 개입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증거로 오라리방화사건 관련 영상이 거론된다. 긴박한 방화 현장임에도 마치 잘 연출된 장면을 촬영하듯 공중과 육상에서 입체적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두 사건 발생 직후인 5월 5일, 군과 경찰 수뇌부들이 제주에 모였다. 비밀회의에서 김익렬은 귀순 독려와 무력 위압을 병용해야 한다면서 경찰이 보여온 문제를 지적했다. 증거물과 사진을 제시했다. 그러자 조병옥 경무부장(당시 경찰총수)은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라면서,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북한에서 공산주의 간부로 활약하는 아버지에게 지령을 받아 행동하고 있다고 지껄였다. 분노한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 들었고 몸싸움을 벌였다.(참고로,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9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교체된다. 이후 군이 4.3 진압에 전면 개입하며 경찰과 정치깡패 서북청년단 등과 함께 강경 토벌 작전을 펼쳐나간다. 도민은 평화적 해결의 기회를 잃고 ‘초토화작전’의 광풍으로 휩쓸리고 만다. 박진경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박진경은 오라리 방화범으로 지목돼 구금된 박모씨를 풀어주었다. 박모씨는 이후 경찰이 된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김익렬 회고록 《4·3의 진실》

김익렬 略史

일제강점기인 1921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넘어가 고베상업대학 졸업 후 학병으로 후쿠지야마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 임관했다.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제주 주둔 9연대장을 거쳐 한국전쟁 발발 후 육군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하고, 육군 제8·제7보병사단장을 지냈다. 1960년에는 제1군관구사령관을 맡다가 1961년 5·16군사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국방대학원장 등을 지낸 뒤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시멘트공업협회 회장, 철강협회 부회장, 제14대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이사장 등을 지내다 1988년 사망했다.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유고로 남긴 회고록 《4·3의 진실》이 사후 발간됐다.

2021년 7월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익렬 장군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2021년 7월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익렬 장군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